오늘의 칼럼

필리핀 ‘바탄 제도’ 호시탐탐 넘보는 중국

중국에서 필리핀 최북단의 ‘바탄 제도(諸島)’(Batanes Islands)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심포지엄이 개최해 논란이 일고 있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결 10주년을 맞아 중국이 새로운 영유권 분쟁을 촉발하는 형국이다.
“필리핀 바탄 제도는 중국의 주권 범위 안에 있다”는 중국 학계의 주장에 필리핀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이 지난 13일 보도했다. 바탄 제도의 영유권 주장은 중국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소재 지난(曁南)대학 국제관계학원 필리핀 연구센터가 지난달 30일 ‘일본·필리핀의 경계획정 배경에서 바탄 제도 주권문제 학술 심포지엄’을 열면서 제기됐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한 중국 정부 싱크탱크 중국사회과학원과 상하이(上海) 국제문제연구원 등 10여개 기관·학자들은 바탄 제도가 지리·문화·역사·법률적으로 대만 관할에 있었던 만큼 그 영유권이 필리핀이 아닌 중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원칙에 따라 대만이 중국의 영토인 까닭에 바탄 제도 또한 중국에 속한다는 것이다.
중국과 대만은 1992년 회담을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 그 표현은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각자의 편의대로 한다(各自表述)”라는 뜻의 ‘일중각표’(一中各表)라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만이 인정했다며 대만을 ‘중국 대만성(臺灣省)’, 즉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중국 학계는 바탄 제도가 대만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근거로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시대의 항해기록을 제시했다. 바탄 제도가 역사적으로 오스트로네시아 문화권에 속했고 거주민들도 이바탄족으로 필리핀인보다 대만 원주민에 가깝다는 주장도 내놨다. 쥐하이룽(鞠海龍) 지난대 국제학부 학장은 “바탄 제도는 단순히 거리 면에서 대만에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대만의 자연스러운 지리적 확장을 이루고 있다”며 “바탄 제도는 명·청 시대에 대만현(縣)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스페인은 역사적으로 19세기 이전 바탄 제도를 실효지배한 적이 없으며, 법적으로도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파리조약이 필리핀 영토의 북방한계선으로 정한 북위 20도선을 벗어난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대 국제관계학원 필리핀 연구센터는 7일 심포지엄 내용을 지난대 홈페이지에 “국가의 중대한 전략적 필요에 봉사했다”고 평가한 글을 올렸지만, 사흘 뒤인 10일 돌연 삭제한 상태다.
필리핀이 관할하고 있는 바탄 제도는 필리핀 루손섬 북쪽으로 162㎞, 대만 최남단 핑둥(屛東)에서 남쪽으로 190㎞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0개 섬으로 구성된 바탄 제도는 서필리핀해와 대만 란위다오(蘭嶼島)와의 사이에 태평양을 연결하는 150㎞가량의 바시해협이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이런 만큼 바시해협은 서태평양과 남중국해를 오가는 상선들과 해저 통신케이블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이다. 괌 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항공기와 해군 군함이 대만해협에 이르는 최단 경로에 위치한 해상로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미군과 필리핀군은 2024년 이후 해마다 바탄 제도 인근에서 1만 7000여명의 대규모 병력이 참여하는 ‘발리카탄’(어깨를 나란히!)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지시라도 내린 듯’ 중국 관영매체들은 바탄 제도에 대한 ‘중국 영유권’ 문제를 앞다퉈 다루며 힘을 실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소속의 국제뉴스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11일 지난대학의 심포지엄을 대서 특필하면서 “바탄 제도는 중국 대만의 부속도서”라며 “일본과 필리핀의 경계 획정 배후에 있는 여러 악의를 경계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같은 날 관영 신화통신 소속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은 한 발 더 나아가 바탄 제도의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고 적었다. SNS 계정 '뉴탄친'(牛彈琴)은 ‘필리핀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관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 판결을 중국이 수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는 것’과 관련해 “이 판결이라는 것은 불법·무효이고 구속력도 없지만, 필리핀이 곳곳에서 선전하고 일부 서방 국가가 지지하고 있어 우리는 어쩐지 다소 수세로 보인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뉴탄친은 이어 “그렇다면 주도적으로 공격에 나서도 괜찮다. 바탄 제도야말로 중요한 돌파구”라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간다면 바탄 제도는 앞으로 분명히 필리핀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학계의 견해에는 논평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국 외교부의 방침이라고 AFP통신은 전했다.
이번 바탄 제도 영유권 주장은 일본과 필리핀 간의 해상 경계를 획정하기 위한 협상을 추진과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두 나라의 해상 경계 획정은 지난 5월 양국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남중국해 배타적경제수역(EEZ)·대륙붕 협상을 말한다.
그동안 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마찰을 빚어온 일본과 필리핀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 정보 공유 등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역내 법적 확실성 향상을 명분으로 남중국해 해양 경계 협상 개시를 명시했다. 이에 중국은 대만 동부에 있는 이 해역의 EEZ와 대륙붕을 자국이 보유한다며 반발했다.
이후 중국은 정부 선박들을 잇따라 대만 주변 해역에 보내 해저 측량 등 관할권을 행사하는 한편 관영매체를 동원해 대만 인근 해역을 중국의 '근해'로 관리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바탄 제도 영유권 주장이 전형적인 중국의 ‘회색지대 전술’(Gray-zone strategy)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회색지대 전술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외교·법률·경제·정보전 등을 교묘히 활용해 시나브로 상대국의 이익을 잠식하는 전략을 뜻한다. 미 스탠퍼드대 해양 회색지대 전술 감시단체인 씨라이트(SeaLight)는 소셜미디어(SNS)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이번 심포지엄이 지난 5월 말 도쿄에서 열린 일본·필리핀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만 동쪽 해역의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 협상에 대한 대응 성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선언 없이 학술·관영 매체들이 앞장서 영유권 근거를 축적하는 ‘법률전’의 하나라며 “바탄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란만으로도 향후 대만 동쪽 해역에서 중국 해경 함대의 ‘순찰’을 정당화하는 데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대만은 제1도련선(島鏈線·오키나와·대만·필리핀을 잇는 섬의 사슬)을 둘러싼 법률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우려했다.
대만 국제관계학자 린취안중(林泉忠)은 13일 홍콩 명보(明報) 칼럼에서 “1898년 파리조약의 공백에도 1900년 미국이 스페인과 맺은 워싱턴조약, 100년이 넘는 필리핀의 실효 통치, 역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주권을 주장한 사례가 전무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며 중국의 영유권 논란을 일축했다.
대신 이번 사례를 “베이징의 새로운 영토 주장이 아닌 법리적 탐색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탄 제도의 최종 영유권의 변화 여부가 아니라 역사·법리·지정학적 전략이 다시 회오리치면서 제1도련선을 둘러싼 정치·안보 질서가 조용하면서도 새로운 경쟁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며 국제사회의 환기를 촉구했다.

린추인(林楚茵) 대만 민진당 의원은 “어디든 ‘원래 중국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중국공산당의 망상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대만을 깎아내리면서 필리핀을 이용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대만 민시(民視·FTV)방송도 “중국이 바탄 제도에 대한 주권 확장을 시도하면서 대만과 일본 오키나와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유사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며 “법적 논리를 내세우고 역사를 왜곡한 뒤 학자들과 관영 매체를 이용해 여론을 조성하고 국제적 여론전을 펼치는 게 중국의 전략”이라고 진단했다.
필리핀은 강하게 반발했다. 에두아르도 오반 국가안보보좌관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허위사실을 반복하며 존재하지 않는 모호함을 만들려는 시도를 간과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안토니오 카르피오 전 대법관은 “바탄 제도가 대만의 자연적 연장이라는 주장을 중국은 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하지 않느냐”며 “바호 데 마신록(스카버러 암초·중국명 黃巖島)과 함께 재판을 받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필리핀 외무부도 대변인 입장문을 통해 중국 학자들의 바탄 제도 주권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는 말에는 대응하지 않아야 하지만, 바탄 제도에 대한 필리핀의 주권은 확정된 것이고 토론의 여지가 없다”며 “필리핀은 영토에 대한 수정주의적 주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이른바 학자라는 사람들에게 그 지역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선의의 연구에 에너지를 집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비판했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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