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지우고 '핵·영토'를 택한 북한의 체제 전환
적대적 두 국가론 제도화, 전시형 병영국가로 회귀
낡은 통일 담론 넘어, 변화한 북한 냉정히 직시할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일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제11차대회 참가자들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조선중앙TV가 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갈무리
북한이 헌법을 다시 고쳤다. 그러나 이번 개정은 단순한 조문 수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헌법 곳곳에서 통일 관련 표현이 사라졌고, 대신 ‘국가’, ‘영토’, ‘핵’, ‘국익’, ‘국가수반’이라는 표현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는 북한이 통일지향 체제를 벗어던지고, 전쟁 억제와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시형 국가체제'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영토 조항의 신설이다. 북한은 개정 헌법에서 자국 영토를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령토”라고 규정했다. 이는 단순한 문구 추가가 아니다. 헌법 차원에서 대한민국을 별개의 국가로 규정한 것이다. 이로써 남북은 더 이상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가 아니다. 이제 남북은 언제든 무력 충돌이 가능한 적대적 국가 관계로 마주 서게 됐다.
기존 헌법에 담겨 있던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 원칙은 삭제됐다. 통일은 더 이상 북한 체제의 핵심 목표가 아니다. 북한은 이미 2023년 말부터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워 남북관계를 완전히 재규정해 왔다. 이번 헌법 개정은 그 노선이 일시적인 대남전술이 아니라 국가 운영 원리로 제도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통일 삭제는 명분일 뿐이다. 핵심은 따로 있다. 본질은 김정은 중심의 유일 체제를 공고히 하고, 국가 시스템 전체를 장기전이 가능한 '병영국가'로 개조하는 데 있다.
새 헌법은 국무위원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수반”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핵무력 지휘권과 핵사용 권한 위임 조항까지 명문화했다. 여기에 최고인민회의 법령에 대한 거부권, 중요 간부 임면권, 대의원 사임 권한 등도 새롭게 부여했다.
이는 단순한 권한 강화가 아니다. 북한 체제가 '당 중심의 혁명국가'에서 '최고지도자 중심의 국가총력전 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특히 핵무력 사용권한 위임 조항은 유사시 지휘체계와 핵운용 지속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북한이 핵을 단순한 정치적 협상 수단이 아닌 실제 전쟁 수행 수단으로 체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사 분야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이번 개헌은 북한의 군사적 야심을 법적으로 뒷받침한다. 헌법은 국방과학기술 발전, 국방공업 현대화, 전민항전준비 강화 등을 새롭게 명시했다. 이는 최근의 북러 군사협력 확대와 궤를 같이 한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목격한 드론전과 총력전의 양상을 국가 시스템에 투영하고 있다. 이번 개헌은 현대전에 최적화된 '전시 국가'로 가기 위한 법적 정비 과정인 셈이다.
경제·사회 조항의 변화 역시 흥미롭다. ‘세금이 없어진 나라’, ‘실업을 모르는 사회’, ‘무상치료제’ 같은 표현들이 삭제되거나 축소됐다. 이는 북한이 과거의 사회주의 우월성 선전보다 국가 운영의 현실성과 지속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혁명적 이상국가보다 장기 생존 가능한 국가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이번 헌법 개정은 북한의 국가 정체성 변화 선언에 가깝다. 김정은은 통일을 지우는 대신 핵과 영토, 국익과 국가수반 체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북한이 앞으로의 시대를 ‘민족통일의 시대’가 아니라 ‘핵을 기반으로 한 장기 대결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국 사회다. 북한은 이미 헌법까지 바꾸며 남북관계를 재설계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통일 담론과 관성적 대북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북한은 지금 일순간 강경해진 것이 아니다. 김정은은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김정은의 새 설계도는 명확하다. '민족'이라는 완충지대를 걷어내고, 오지 '국익'과 '힘'이 지배하는 장기적인 대결 구도로 복귀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통일 낙관론도, 감정적 적대감도 아니다. 헌법까지 고쳐가며 국가 정체성을 재편하고 있는 북한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이다.
ⓒ
글/ 박은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