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굴욕을 견딘 영웅 – 젊은 이순신 [정명섭의 실록 읽기㊵]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7.14 14:01  수정 2026.07.14 14:01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노량 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한 명장이며 무패의 신화를 불멸의 영웅이자 마지막 전투에서 쓰러진 비극적인 서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이순신의 이미지는 대부분 임진왜란이 당시의 모습이다. 그 이전,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영웅담보다는 차라리 좌절의 연속에 가까웠다. 화려한 완성 이전에 그가 견뎌야 했던 시간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아는 이순신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서기 1545년 3월 8일, 한양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이씨로, 아버지 이정은 벼슬을 받은 적이 없는 선비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탓에 처가가 있던 충남 아산으로 내려가. 어릴 때부터 무예에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늘 지휘를 맡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문과를 포기하고 무과를 통해 입신하기로 결심한 이순신은 20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했다. 서기 1572년, 훈련원에서 치른 무과 시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동여매고 마저 일어났다고 전해지지만, 결국 그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28살의 나이였다. 재도전이 쉽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4년을 더 버텨서 32살이 되던 서기 1576년에야 비로소 무과에 급제했다. 당시 무과 급제자의 평균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순탄한 시작이 아니었다.



ⓒ본인 촬영


무과 급제 이후 이순신은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부임지에 발령받았다. 조산보만호, 훈련원 봉사 등을 거치며 변방의 하급 무관 생활을 이어갔다. 서기 1579년에는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근무했는데, 이때 상관과의 갈등으로 파직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당한 처사에 굽히지 않는 성격이 이미 이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복직 이후 그가 마주한 사건은 더욱 가혹했다. 서기 1587년 가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여진족의 기습을 받았다. 방어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즉각 반격해 포로로 잡힌 조선 병사들을 되찾아 왔고 여진족을 쫓아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었다. 조선 백성 일부가 납치되고 병사들이 희생된 책임을 물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 처분까지 받은 것이다. 공을 세웠음에도 결과의 일부가 나빴다는 이유로 죄인이 된 셈이었다. 관직에 오른 지 10년이 넘도록 쌓아올린 것이라고는 두 번의 파직과 한 번의 백의종군뿐이었다. 이 시기, 이순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좌절할 때마다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훗날 그를 다른 무관들과 구별 짓는 핵심이 되었다.


이순신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한 사람 덕분이기도 했다. 바로 류성룡이었다. 이순신과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류성룡은 그의 됨됨이와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기 1591년, 선조에게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것이 류성룡이었다. 당시 이순신의 품계는 정읍 현감으로 종6품에 불과했다. 전라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직이었다. 무려 7단계를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파격 인사였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자격 미달이라는 비판과 함께 류성룡이 사적인 연줄로 발탁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쏟아졌다. 하지만 류성룡은 물러서지 않았고, 선조는 결국 임명을 허락했다. 일단 승진을 시키고, 연달아 승진시키는 방식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부임한 이순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선과 무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배는 낡았고, 군사들의 훈련 상태는 엉망이었다. 거북선 건조를 진두지휘하면서 동시에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각종 화포의 정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부임 13개월 만인 서기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거북선이 처음 실전에 투입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였다. 준비가 된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순신을 완성된 영웅으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부터 탁월했고, 항상 옳았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존재로. 하지만 그가 첫 무과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부당한 파직에 무릎을 꿇어버렸더라면, 녹둔도의 억울한 처분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했다면, 우리가 아는 이순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견뎌낸 것들은 단순히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억울한 처분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의 기준을 낮추지 않는 태도의 문제였다. 두 번의 파직과 한 번의 백의종군을 겪은 끝에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비로소 역사 속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7년 전쟁 내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 노량 바다에서 그는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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