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경희한의원 구로디지털단지점 이한별 원장.
지난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누군가는 당선의 환호 속에 새 임기를 시작했지만 그 반대편에는 하루아침에 '후보'라는 무대에서 내려온 낙선자들이 있다.
어제까지 수백 명의 지지자에게 둘러싸여 있던 사람이 다음 날 아침 텅 빈 사무실을 마주하는 순간, 몸은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선거 낙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승진을 기대했다가 누락되면서 상여금이 깎이는 순간처럼 작은 지위 추락도 있고 정리해고, 사업 부도, 주식 투자 손실 같은 극적인 추락도 있다. 흥미롭게도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이미 400여 년 전, 지위와 부를 잃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병을 하나의 질환으로 분류해뒀다.
바로 '탈영실정(脫營失精)'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비롯된 이 개념은, 높은 자리에 있다가 천한 처지가 되어 생긴 병을 탈영(脫營, 영양을 운반하는 기운이 빠져나감), 부유하게 살다 가난해져 생긴 병을 실정(失精, 생명의 근원 물질인 정이 메마름)이라 불렀다.
실제로 선거 낙선, 실직, 사업 실패, 투자 손실 모두 같은 범주에 포함된다. 400년 전 의학서가 오늘날을 진단한 것이다.
증상은 의외로 구체적이다. 입맛이 사라지고 몸이 나날이 야위며, 기력이 바닥나 으스스 춥고 작은 일에도 잘 놀란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르며, 심하면 손발이 떨리기도 한다. 한의학에서 우울감의 큰 줄기인 기울(氣鬱, 기의 흐름이 막혀 정체된 상태)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이는 병증이다.
"옛 사람들의 막연한 비유가 아니냐"고 들릴 수 있지만 현대 신경과학은 거의 같은 그림을 그려낸다. 동물에게 서열 다툼에서 반복적으로 지는 경험을 주는 '사회적 패배 스트레스(social defeat stress)' 모델 연구에 따르면 패배한 개체는 식욕과 활동량이 줄고 즐거움을 느끼는 반응이 무뎌지며 스스로를 무리에서 고립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나 적응장애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생리적 반응이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과 뇌의 보상 회로를 동일하게 흔든다는 점이다. 지위의 상실은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라 몸의 병이며, 탈영실정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 '동의보감'은 교감단(交感丹), 천왕보심단(天王補心丹), 승양순기탕(升陽順氣湯) 같은 처방을 제시했다. 가라앉은 기운을 끌어올리고 메마른 심혈(心血)을 보충하는 방향이다. 침 치료에서는 신문(神門, 손목 안쪽 새끼손가락 쪽)과 태충(太衝, 엄지·둘째 발가락 사이) 같은 혈자리를 활용해 마음을 안정시킨다.
여기에 규칙적인 수면과 식사, 아침 햇볕 노출, 가벼운 운동을 더하면 생체 리듬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체질과 증상에 맞춘 변증(辨證, 증상의 원인을 가려 진단함) 위에서 이뤄져야 하며, 증상이 깊거나 오래갈 때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함께 받는 것이 원칙이다. 한의학적 치료는 그 회복의 길에서 빠져나간 몸의 기운을 함께 받쳐주는 역할로 의미를 갖는다.
마음의 무너짐은 다른 마음을 못 먹게 하는 우울증약만이 답이 아니다. 무너진 마음을 몸이 지탱해줄 수 있게끔 몸을 보충하는 치료가 정신과적 치료와 함께하거나 정신과적 치료 이후에라도 꼭 동반돼야하고 이는 한의학으로만 가능하다.
진정한 회복은 약물이 아닌 빠져나간 몸의 기운을 되돌려 정신이 자연스럽게 일어서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만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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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한별 한의사·구로디지털단지 고은경희한의원 대표원장(lhb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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