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체’의 앤트밀처럼 도는 선거 불신 [기자수첩-문화]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6.09 08:25  수정 2026.06.09 08:26

‘군체’가 보여준 집단지성의 오류, 현실의 선거 불신을 비추다

지난 주말 ‘2026 위버스콘 페스티벌’ 취재를 위해 찾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앞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을 봤다. 응원봉을 든 팬들 사이로 대한민국 국기와 미국 국기를 든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재선거’를 외치고 있었다.


지난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앞에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재선거’를 외치고 있는 인파.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음악 축제를 취재하러 간 길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마주했다. 공원 안에서 음악 축제가 열리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선거 불신을 둘러싼 시위가 이어지는 묘한 현장이었다. 투표소였던 핸드볼경기장은 이날 페스티벌 관객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었으나 온전히 열리지 못했고, 팬들은 땡볕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는 영화 ‘군체’ 속 앤트밀이 떠올랐다. 앤트밀은 개미들이 페로몬 경로를 잃고 앞선 개미를 따라 원형으로 계속 도는 현상이다. 각 개미는 자신 앞의 개미를 따를 뿐이지만, 잘못된 경로가 원을 이루면 무리 전체가 같은 자리를 맴돈다. ‘군체’는 이 현상을 좀비 장르 안으로 끌어온다. 서로 뉴런처럼 연결된 감염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려보내고, 그 정보가 중심이 되자 이 좀비들은 끝없이 돌기 시작한다.


영화 속 감염자들은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연결돼 있다. 페로몬과 점액질, 집단지성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학습한다. 그러나 ‘군체’는 그 연결을 구원으로 그리지 않는다. 하나의 오류가 전체 사고에 끼어드는 순간, 집단지성은 더 빠르게 오작동한다. 개별 판단은 사라지고, 잘못을 수정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모두가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고 해서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영화의 섬뜩함이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지연되거나 혼선이 발생했다면 이는 명백한 선거관리 부실이다. 유권자가 정해진 절차 안에서 차질 없이 투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선거관리기관의 기본 책무다.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원인을 밝히고,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선거관리 부실과 조직적 부정선거는 다른 문제다. 부실은 행정 실패이고, 부정은 의도와 공모, 조작 경로, 결과 왜곡의 증거가 필요한 중대 범죄다. 둘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리는 순간 문제 제기는 검증이 아니라 확신으로 이동한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사실은 따져야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선거가 조작됐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올림픽공원 앞 시위에서 오래 남은 것은 구호의 크기보다 분노의 방향이 흐릿하다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묻는 일과,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모든 장면을 그 결론의 증거로 끌어당기는 일은 다르다. 선거관리 부실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어느 순간 부정선거 확신으로, 다시 재선거 요구로, 또 다른 책임론으로 이어질 때 질문은 점점 사라지고 구호만 남는다.


선관위는 행정부 산하기관이 아니라 헌법상 독립기관이다. 선거와 국민투표를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독립성을 부여받은 기관이다. 선관위가 잘못했다면 그 책임을 묻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행정부 수반이 선거관리기관을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식의 요구는 다른 위험을 낳는다. 선거관리의 실패를 따지는 일과 선거관리기관의 독립성을 흔드는 일은 구분돼야 한다.


시위대의 분노를 모두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실제 부실이 있었고, 그 부실은 불신의 출발점이 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의심이 제도 개선을 향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결론 주변을 맴돌기 시작할 때 불신은 스스로를 강화한다. 같은 구호가 반복되고 서로를 확인해주는 순간 의심은 질문이 아니라 신념이 된다.


‘군체’ 스틸컷 ⓒ쇼박스

‘군체’의 앤트밀이 무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염자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가 아니다. 멈춰 서서 다른 방향을 볼 개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연결돼 있지만 누구도 오류를 수정하지 못한다. 같은 신호를 따르는 연결은 효율적이지만 그 신호가 틀렸을 때 전체를 더 빠르게 무너뜨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을 금지하는 일이 아니다. 의심은 민주주의에 필요하다. 선거관리기관을 감시하고, 부실을 따지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일은 시민의 권리다. 하지만 의심은 증거와 절차 안에서 다뤄져야 한다. 부실을 부실로 따지고, 부정을 부정으로 입증해야 한다. 두 단어가 뒤섞이는 순간 책임 추궁은 제도 개선이 아니라 확신의 순환으로 바뀐다.


‘군체’는 완벽한 연결이 인간을 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의견이 남아 있고, 오류를 수정할 수 있으며, 소수의 판단이 묵살되지 않는 연결에 있다. 선거 이후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불신이 생겼다면 따져야 한다. 다만 그 불신이 앤트밀처럼 같은 자리를 돌지 않게 하려면, 질문은 구호보다 구체적이어야 하고, 분노는 증거와 절차를 만나야 한다.


시민사회는 부실과 부정을 구분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은 의심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의심이 검증 가능한 절차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같은 자리를 도는 확신이 아니라, 멈춰 서서 되묻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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