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숙청이 보여주는 북한 권력의 속내
메가 프로젝트의 덫에 걸린 김정은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9기 제1차 확대회의를 주재했다고 1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갈무리
독재자는 언제 '공포'를 공개적으로 사용할까.
대체로 독재자는 권력이 흔들릴 때, 공포정치를 강화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개 숙청을 단순히 '권력 위기'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독재체제에서 최고지도자는 선거로 심판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과에 대한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최고지도자가 직접 공언한 정책은 곧 자신의 정치적 약속이 되고, 그 약속은 결국 눈에 보이는 성과로 입증되어야 한다. 목표를 크게 제시할수록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도 커진다. 그렇기에 독재자는 실패를 인정하기보다, 실패를 책임질 희생양을 먼저 만든다.
실제 북한에서는 공포를 공개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다. 남포조선소 사고 당시 김정은이 책임 간부들을 이례적으로 공개 질책했던 장면은 예고편이었다. 최근 박희철 전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과 그 측근들에 대한 대규모 공개 숙청은 본편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간부들의 부패와 태만은 북한 체제가 오랫동안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인가. 간부들의 부패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왜 현시점에 과거 장성택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당·정·군 연합회의'까지 열어 최고지도자가 직접 분노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노출한 것일까.
그 배경에는 김정은의 조급함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김정은은 야심 차게 기획한 국가적 프로젝트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지방발전 20×10 정책부터 원산·갈마 관광지구 개발, 군수공업 현대화, 대외관계 재정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빠른 시일 내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하는 메가 프로젝트들이다.
정책은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특히, 최고지도자가 인민들에게 직접 성과를 약속한 이상,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이를 증명해내야 한다. 여기에 북러 밀착과 북중관계 변화라는 대외적 변수까지 맞물리면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정책 집행력을 어느 때보다 쥐어짜 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문제는 거창한 목표가 선포됐지만, 성과가 턱없이 더디다는 점이다. 정책은 발표하는 순간 지도자의 굴레가 되지만,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현실의 성과는 더디지만, 약속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시간의 압박이 김정은을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독재자가 가장 먼저 손대는 것은 정책의 궤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지금 북한의 공개 숙청이 보여주는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특정 간부 몇 명을 벌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모든 관료를 향해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단상 위에서 공개적으로 처벌당하는 동료를 바라보며, 아래에 선 당·내각·지방의 모든 관료들은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다. 처벌은 개인을 겨냥하지만, 공포는 엘리트 관료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다.
최근 나타나는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김정은이 공언한 정책 성과를 강제로 쥐어짜 내기 위해 공포를 고도로 활용하는 '성장 압박형 통치술'에 가깝다. 공포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과를 앞당기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 이번 숙청 국면은 체제의 흔들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이 안정되어 있기에 이런 과감한 공포 통제가 가능한 것일 수 있다. 핵심은 권력의 불안이 아니라, 김정은 스스로 던져놓은 메가 프로젝트들의 약속 기한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가 프로젝트는 지도자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가장 큰 정치적 부담이 되기도 한다. 목표를 크게 제시한 지도자일수록 성과가 뒤따르지 않을 때, 권위에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커진다. 김정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관료들의 부패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약속한 장밋빛 미래가 미완으로 끝나는 것이다.
김정은은 권력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이미 권력을 확고히 쥔 채, 자신이 약속한 성과를 온 천하에 입증해야 하는 지도자다. 최근의 공개 숙청을 단순한 공포정치의 부활로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포라는 수단은 같을지 모르지만, 공포를 사용하는 이유는 달라졌다. 앞으로 북한을 읽을 때, 관건은 누가 숙청되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개 숙청이 반복되는가를 지켜보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김정은의 통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신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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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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