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이 아니라 백제를 무너뜨린 구조가 문제
일본 고교 결승 6만 관중…한국은 수백 명
공부와 운동이 상극인 나라의 한계
감독 바꿔도 토양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는 같다
홍명보 전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이 6월 30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뉴시스
백제는 황산벌에서 패했기에 멸망했는가.
아니다. 백제는 이미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정치도, 군사도, 국가 시스템도 오랫동안 흔들리고 있었다.
황산벌은 단지 그 모든 균열이 한순간에 드러난 마지막 장면이었을 뿐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도 바로 그것이었다.
홍명보 감독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책임은 분명하다. 감독 선임 과정도, 협회의 운영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오는 22일 국회 청문회가 두 사람을 질타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한국 축구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을 심판한다고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늘 마지막 장면만 본다. 계백은 보지만 곪아 터진 백제는 보지 않는다.
6만 142명.
이 숫자는 한국 축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숫자다. 올해 1월 열린 제104회 일본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도쿄 국립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 수다. 국가대표 A매치도 아니고 프로 결승전도 아니다. 고등학생들의 경기였다.
입장권은 경기 이틀 전에 모두 매진됐고 결승전은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수천만 명이 TV 앞에서 고등학생들의 땀방울을 지켜봤다.
놀라운 것은 올해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 고교축구 결승전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5만 관중 시대를 열었고, 올해는 마침내 6만명을 넘어섰다. 이것은 축구 실력이 아니라 스포츠 문화의 깊이를 보여주는 숫자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국가대표 경기에는 열광한다. 그러나 K리그 평균 관중은 1만 명 안팎이다. 고교 축구 결승전은 수벡명에서 1000~2000명으로 대부분 학생과 학부모가 찾는다. 표를 사서 고교 축구를 보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축구를 사랑하기보다 국가대표를 소비하는 데 익숙한 것은 아닐까.
축구 강국은 스타 선수 몇 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중도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문화가 먼저다.
그 저변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일본 고교 축구부는 약 3700개, 등록 선수는 14만명에 이른다. 한국은 약 200개 학교, 6000명 수준이다. 20분의 1이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고교 야구부만 3,700여 개가 넘고 대학 야구부가 370여개에 달한다. 한국은 고교 약 100개, 대학도 50개가 채 되지 않는다.
여자 고교 야구부는 한국에는 단 한 곳도 없지만 일본에는 60여 개가 운영된다. 대학 농구부 수도 비교가 어려울 정도다.
인구 차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격차다. 토양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이웃 나라의 사례를 거론하는 것은 결코 그들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닮아가자는 맹목이 아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스포츠 생태계를 비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조군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비추어보자는 이유다.
그 차이는 결국 세계 무대에서 나타난다.
유럽 축구 프로리그에서 뛰는 일본 선수는 60명을 넘어선다. 한국은 10여 명 수준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에서도 일본 선수는 두 자릿수지만 한국 선수는 손에 꼽는다.
이번 월드컵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타 선수 몇 명에게 의존하는 축구는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대표팀은 결과일 뿐이다.
결과는 토양을 이길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현상이 특정 국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지방정부 세금으로 프로구단을 유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것과는 다르다. 국내 리그의 자생력과 열정적인 팬 문화가 대표팀을 떠받친다. 유소년 아카데미는 아이들에게 무료로 축구를 가르친다.
멕시코 역시 마찬가지다. 대표팀보다 먼저 강한 국내 리그가 존재한다.
축구 강국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대표팀이 아니라 생태계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거꾸로다. 오직 대표팀만 바라본다.
사실 이 글은 축구 이야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축구는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다. 한국 스포츠 전체의 깊이 없는 구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 바탕에는 한국 스포츠 교육의 문제가 존재한다.
우리 교육은 일반 학생에게서는 운동장을 빼앗았고, 운동선수에게서는 교실을 빼앗았다.
학생은 공부 아니면 운동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 학생은 운동을 멀리하고, 운동선수는 사회를 배울 기회를 잃는다.
서울대 야구부는 늘 '자랑스러운 꼴찌'라는 별명으로 소개된다. 많은 사람들이 미담으로 소비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자랑할 만한 일인가.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왜 우리나라는 공부와 운동이 상극으로 위치하는가? 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운동장을 잃은 교육에서 건강한 스포츠 문화가 자랄 수 없다.
일본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우리처럼 특기자 전형도 거의 없다.
교토대 공대를 졸업한 뒤 세계 신기록을 세운 경보 선수, 게이오대 야구부 투수로 뛰면서 국가공무원 종합직시험(한국의 행정고시)에 합격한 학생, 도쿄대 야구부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학생.
이들은 특별해서가 아니다. 공부와 운동을 함께하는 문화가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결과다.
스스로 공을 차보고 스포츠가 일상이 되어야, 프로선수도 되고 지도자도 되고 축구행정가도 되고 스포츠 마케터가 된다. 그리고 축구장을 찾는 진짜 팬이 된다.
그렇게 스포츠 문화는 세대를 이어 성장한다.
과거 우리와 스승을 공유했던 일본 축구의 역사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오늘날 일본 축구는 독일인 데트마르 크라머를 '일본 축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일본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지금도 '100년의 은인'으로 존경받는다.
반면 한국도 1992년 같은 크라머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그는 불과 1년 만에 한국을 떠났다. 군대식 문화와 폐쇄적인 축구계 풍토, 기존 지도자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스승을 만났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상대는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사람을 밀어냈다.
2002년 월드컵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4강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 무엇을 남겼는가. 히딩크라는 영웅은 기억하지만 히딩크가 이식하려 한 시스템은 남기지 못했다.
월드컵 열기는 거대했지만 학교 스포츠는 달라지지 않았고, 지역 리그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유소년 생태계도 바뀌지 않았다. 축제는 성공했지만 문화는 남기지 못한 것이다.
2002년은 한국 축구가 세계를 놀라게 한 해였지만, 동시에 우리가 시스템을 구축할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친 해이기도 했다.
팬은 국가대표 경기만 응원하는 뜨내기가 아니다.
유소년 경기 입장권을 사고, 지역 구단을 응원하고, 동네 운동장을 지키는 사람이다. 스포츠는 애국심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문화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 축구협회는 인맥과 폐쇄성으로 끊임없이 비판받는다. 한 재벌 가문의 사촌 형제가 도합 30년 가까이 협회를 이끌어왔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반면 일본 축구협회는 철저히 임기를 제한한다. 최근 40대 국가대표 선수 출신 행정가를 회장으로 선출하며 시스템의 역동적인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인물은 유한하되 시스템은 영원해야 한다는 상식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축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문성보다 친분이 앞서고, 원칙보다 사람이 앞서는 사회.
축구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축구협회를 향한 비판은 결국 우리 사회를 향한 질문이어야 한다.
오는 22일 국회 청문회는 시의적절하다.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또다시 계백만 심판하고 백제를 무너뜨린 구조를 외면한다면, 제2의 홍명보도, 제3의 정몽규도, 또 다른 실패도 반복될 것이다.
황산벌에서 계백은 패배했다. 그러나 백제가 무너진 건 계백의 패배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한국 축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계속 마지막 장면만 심판한다면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구조를 바꾸는 일이 훨씬 어렵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람을 백 번 바꿔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심판해야 할 것은 계백이 아니라 백제를 무너뜨린 구조다.
이제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은 감독 한 사람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시스템의 토양이다.
문제는, 어디 축구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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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상환 환경국립대 객원교수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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