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해상교통로(SLOC)는 안녕하십니까?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5.23 06:00  수정 2026.05.23 06:00

호르무즈해협 인근 오만만 무스카트 항에 유조선들이 정박해 있다.ⓒ로이터/연합뉴스
99.7%의 잔인한 외줄 타기: 섬나라 대한민국의 취약한 생존 구조


대한민국의 대외 무역은 중량 기준 전체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오직 '배'에만 의존한다. 연간 13억에서 15억 톤에 달하는 거대한 화물이 전국 무역항을 통해 오갈 동안 항공운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0.3% 미만이다. 남북 분단이라는 지정학적 단절 탓에 육상 실크로드를 잃어버린 우리는, 사실상 대륙에 붙은 외로운 '섬나라'나 다름없다.


천연자원이 전무해 해외에서 원자재를 대량으로 들여와 가공한 뒤 다시 배에 실어 보내야 하는 가공무역 구조상, 해상교통로(SLOC)의 안녕은 곧 국가의 호흡이다. 그리고 그 호흡기는 지금 너무나도 취약한 항로들로 쪼개져 있다. (요즘은 우리의 해상교통로 현황은 AI가 금방 컨셉을 잡아 정리해 준다)


[남방항로 : 에너지 생명선] 중동에서 인도양, 말라카 해협을 거쳐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전체 물동량의 33~40%를 차지하는 부동의 1위다. 원유 수입의 약 90%, 천연가스(LNG) 수입의 30% 이상이 이 좁은 뱃길을 통과한다. 호르무즈와 말라카라는 지정학적 병목(Choke Points) 중 단 한 곳만 막혀도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은 즉각 정지된다. 인도네시아 롬복 해협으로 우회하면 된다는 낙관론은 위험하다. 최소 3~7일의 운항 일수가 추가되고 전쟁위험할증료가 붙는 순간, 국내 수입 물가는 폭등은 불가피하다.


[태평양항로 : 경제적 동맥] 물동량 비중은 15~20% 내외지만, 자동차와 첨단 IT 제품 등 고부가가치 컨테이너 화물이 집중되어 있다. 아시아발 미주향 컨테이너선 물량 중 한국 선대가 차지하는 비중만 10.3%에 달한다.


[유럽 및 북극항로 : 낮은 가성비] 전체의 10~15%를 담당하는 유럽항로는 홍해 사태로 인해 수에즈 운하를 대체할 경우,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하게 되어 물류비 폭등이 불가피하다.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아 열렸다는 북극항로는 운항 거리를 단축해 줄 대안 항로로 거론되지만, 상업적 물동량 비중은 여전히 1% 미만이다.


거래적 외교(Transactional Diplomacy)의 위험


이러한 우리의 취약한 생존구조에 적신호들이 켜지고 있다.


지난 14~15일 중국 베이징에서 마주 앉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소는 유독 묘한 여운을 남겼다. 두 거물의 머리싸움 속에서 날아든 소식은 동북아 안보 지형에 꽤나 서늘한 한기를 몰고 왔다.


미 행정부는 대만관계법을 내세워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기존 방패를 유지하는 척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승인이 보류됐던 140억 달러 규모의 대만 무기 판매 패키지를 두고 "팔 수도 있고 안 팔 수도 있는, 아주 좋은 협상 칩(Negotiating Chip)"이라 공언한 것이다. 수십 년간 미 행정부를 지탱해 온 외교적 원칙과 억제력의 신호가 의심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적 외교(Transactional Diplomacy) 패턴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만 해협을 안방처럼 드나들어야 하는 대한민국에 결코 남의 집 불 구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중 갈등의 뇌관이 단기적 실리와 연계되는 순간, 인태(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우산은 언제든 걷힐 수 있는 가벼운 천막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협상 칩'의 유효기간이 다해 대만 해협에서 우발적 무력 충돌이 터지거나 남중국해 전역이 봉쇄된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우리가 치러야 한다. 반도체 패키징 자재나 배터리 원소재 같은 공급망이 단절되어 국내 제조업 공장들이 일제히 가동을 멈추는 국가적 셧다운 시나리오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고래들의 거대한 체스판에 우리의 미래가 슬그머니 판돈으로 올라가는 형국이다.


'나무호'의 비명과 '엄중한 유감'의 나약함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은 중동의 화약고에서 타오르는 중이다. 올해 초 발발한 미국과 이란 간의 군사 충돌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항은 이미 숨통이 턱 막혔다. 참혹한 진실은, 지난 4일 미국 중부사령부(CENTCOM)가 갇힌 선박들을 구출하겠다며 '호르무즈 해방작전(프로젝트 프리덤)'을 개시한 바로 그날 터졌다.


작전의 불똥이 그대로 튀어 한국 국적 HMM '나무호'를 비롯한 민간 상선들이 보복성 피격을 당한 것이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 안에는 나무호를 포함한 한국 관련 선박 26척과 대한민국 선원 160명 가량이 고립돼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우리의 해상교통로.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은 국무부 주도로 '해양 자유 연합(MFC)' 구상을 던지며 동맹국들의 참전과 군사적 기여를 은근히 압박하는 모양새다. 영국과 프랑스는 벌써 파리에서 50개국 정상회의를 주재하며 독자적인 해양 안보 연대를 꾸렸고 리투아니아 같은 소국마저 파병을 결정했다.


그런데 정작 상선이 두들겨 맞고 국민이 인질로 잡힌 대한민국의 대응은 참으로 조심스럽다. 정부는 그저 외교부 대변인의 입을 빌려 '단계적 기여 방안 검토'나 '엄중한 유감' 같은 영혼 없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종이 위에 적힌 나약한 외교적 문구 몇 줄로 이란 혁명수비대의 대함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생명선이 통째로 저당 잡힌 위기 상황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간만 보며 결단을 미루는 깊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한·미·일 해양 안보 연대라는 현실적 생존법


정치권과 안보 커뮤니티는 위기가 올 때마다 '대양해군(Blue-water Navy)' 육성이라는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 이지스함 몇 척 더 띄우고 기동함대를 건설해 우리 상선은 우리가 직접 지키자는 자주국방의 서사는 가슴 뿌듯하고 웅장하다.


군사력을 키우는 자구책이야 당연히 필요하지만, 솔직해지자. 남중국해가 얼어붙고 호르무즈에서 포탄이 날아다니는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우리 해군의 몇 안 되는 전력만으로 수천 척의 상선을 겹겹이 호위하며 호기롭게 바다를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대답은 냉정하게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 지나친 낭만주의는 거두고 차가운 현실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간 해양안보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발을 담그는 것 뿐이다. 그 핵심이 바로 MDA(Maritime Domain Awareness·해양상황인식) 체계다.


MDA란 거창한 군사 용어 같지만 쉽게 말해 '전 세계 바다 위에 떠 있는 모든 선박의 움직임과 잠수함, 해적 등의 위협 요소를 실시간으로 꿰뚫어 보는 글로벌 해상 폐쇄회로TV(CCTV) 겸 내비게이션 네트워크'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 홀로 망원경을 쥐고 경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초강대국들의 인공위성과 첨단 레이더망에 함께 감시망을 엮어야만 해상에서의 무수한 돌발위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우선 지난 2023년 캠프데이비드 합의로 출범한 '한·미·일 해양안보협력 프레임워크(TMSCF)'를 빈 껍데기로 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가동해야 한다.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에서의 규범 기반 질서를 지키기 위해 3국의 공조를 제도적으로 굳혀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일본·호주·인도가 묶인 '쿼드(QUAD)'와의 연대도 필수적이다. 비록 우리가 정식 회원국은 아닐지라도, 쿼드가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해양상황인식 파트너십(IPMDA)'과의 정보 공유를 집요하게 타진하고 워킹그룹 단위의 기능적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혼자서 망원경을 들고 징을 치며 바다를 지키겠다는 기개는 가상하나, 현대의 해양 안보는 거대한 정보망의 싸움이다. 다층적인 국제 안보 연대라는 촘촘한 그물망 속에 우리 바닷길을 편입시키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경제의 목줄은 언제든 타국의 손에 끊길 수 있다.


다시 한번 냉정하게 묻는다. 동맹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 독자적인 기개만으로 이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 없다면 지금 당장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고 연대의 테이블로 나아가야 한다. 바다는 결코 백년전의 낭만적인 자주성을 보아주지 않는, 오직 힘의 논리만 지배하는 냉혹한 투기장이기 때문이다.



글/이인배 한반도미래포럼 수석연구위원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