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경희한의원 구로디지털단지점 이한별 원장.
초복이 코앞인데 하늘은 연일 흐리고 공기는 후텁지근하다. 장마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무더위도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에어컨도 제습기도 없던 조선의 궁궐에서는, 먹는 보양식 못지않게 '마시는 보약'이 여름나기의 중심에 있었다.
그 전에 '복(伏)'의 뜻부터 짚어보자. 삼복은 하지(夏至) 뒤 세 번째 경일(庚日, 날짜에 붙는 십간 중 '경'이 든 날)을 초복, 네 번째 경일을 중복, 입추 뒤 첫 경일을 말복으로 삼는다. 경(庚)은 오행에서 가을의 서늘한 금(金) 기운에 해당하는데, 한여름의 화(火) 기운이 워낙 강해 금 기운이 세 번이나 엎드려(伏) 숨는다는 뜻이다.
복날이란 결국 '가을이 세 번 굴복할 만큼 더위가 절정인 날'이라는, 꽤 절묘한 이름인 셈이다. 한의학은 이 시기의 탈을 서병(暑病, 더위로 생기는 병)이라 불렀다. 땀을 지나치게 흘리면 기(氣)와 진액(津液, 몸의 정상적인 수분)이 함께 빠져나가, 무기력하고 입맛이 없고 갈증이 그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본 것이다.
조선 왕실의 여름나기는 치밀했다. 나라는 겨울 한강의 얼음을 동빙고서빙고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여름이면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반빙(頒氷) 제도를 '경국대전'에 규정해 두었고, 단오가 되면 공조에서 만든 부채를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했다. 임금 스스로도 경회루나 후원처럼 물과 그늘을 낀 곳을 찾아 더위를 피했다.
그러나 왕실 피서법의 정점은 역시 약이었다. 조선 후기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는 단오에 내의원이 제호탕을 지어 임금께 올리고 임금은 이를 원로 대신들이 모인 기로소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매(烏梅, 연기에 그을려 말린 매실)와 사인백단향초과를 꿀에 재어 냉수에 타 마시는, 말하자면 왕실 공인 여름 음료였던 셈이다.
'동의보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름에는 맥문동인삼오미자를 달인 생맥산(生脈散)을 숭늉 대신 마시게 하라고 권했다. 실제 '승정원일기'에는 더위에 지친 임금에게 생맥산과 청서익기탕(淸暑益氣湯, 더위를 식히고 기운을 보태는 처방)을 올린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처방들을 현대의 눈으로 다시 읽을 때다. 오매의 구연산 같은 유기산은 침 분비를 자극해 갈증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인삼의 진세노사이드는 항피로 작용이, 오미자의 시잔드린은 항산화 작용이 여러 연구를 통해 보고돼 있다.
땀으로 잃은 수분과 전해질을 보충하고 몸의 열을 식히라는 오늘날의 온열질환 예방 수칙과 기와 진액을 지키라는 수백 년 전의 처방이 같은 사실을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임상에서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늘어지고 입맛이 없다는 분들에게 생맥산이나 청서익기탕을 활용한다. 냉방과 폭염 사이를 오가며 지치는 현대인의 여름이, 땀으로 기가 새어 나가던 옛사람의 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어지럽고 땀조차 나지 않는 열사병 의심 상황이라면 한약이 아니라 즉시 몸을 식히고 병원을 찾아야 하며, 지병으로 약을 복용 중이라면 주치의한의사와 상담 후 드는 것이 안전하다.
삼복을 이기는 지혜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인지 모른다. 더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더위에 새어 나가는 나를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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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한별 한의사·구로디지털단지 고은경희한의원 대표원장(lhb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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