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두 번째 스핀오프 – 제2차 을묘왜변 [정명섭의 실록 읽기㊱]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5.19 14:01  수정 2026.05.19 14:01

명종 10년인 서기 1555년 6월, 전라도를 휩쓸고 약탈과 살육을 저지른 왜구가 이번에는 제주도로 향했다. 달량포에서 시작한 전라도 공략이 여의치 않자 새로운 목표를 정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전라도에 이어 제주도를 공격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왜구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침략의 규모로 봐서는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제주도를 점령해서 근거지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당시 왜구는 일본인 뿐 만 아니라 왕직으로 대표되는 중국인들도 대거 가담했다. 이들에게 제주도는 중국 남부와 일본을 잇는 중간 거점으로서 매려적인 장소였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이 시기의 배들은 바람을 이용한 돛이나 사람이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였다. 거기다 태풍이 불면 피할 곳도 있어야 했기 때문에 바다 한복판에 있는 제주도를 탐낼 수 밖에 없었다.


제주성의 성벽 ⓒ직접 촬영

사실 왜구는 진작부터 제주도를 탐냈다. 3년 전인 1552년 7월에 제주 동쪽 천미포에 상륙해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한 적이 있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간신히 왜구들을 몰아냈지만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주 목사 김충렬과 정의현감 김인이 파직되었다. 이후에 1554년에도 왜구들이 천미포에 나타났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김수문을 새로 제주목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6월 27일, 수십척의 배에 나눠 탄 1천 명의 왜구들이 제주도 화북포에 모습을 드러냈다.


뭍으로 상륙한 그들은 곧장 제주 성을 포위하고 동문 밖 높은 언덕에 진을 쳤다. 제주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화살을 쏘아대고 제주 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비록 전라도에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조선군이 제대로 반격해서 물리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자랑했다. 제주 목사 김수문은 즉시 성문을 닫고 방어에 나섰다. 3일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성벽 위에서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성 아래에서는 왜구가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오려 했다. 잘 막아내긴 했지만 육지에서 구원군이 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돌파구가 필요했다.


김수문은 고민 끝에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날랜 군사 70명을 뽑아 치마돌격대를 조직한 것이다. 말을 타고 돌격해서 적의 진형을 흔들고, 재빨리 빠져나오는 기동타격대였다. 아무리 말을 탔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천여 명에 달하는 왜구였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김수문은 결정적인 순간에 치마돌격대를 써서 왜구를 물리치기로 결심한다. 6월 27일, 김수문은 치마돌격대를 이끌고 직접 출격했다. 적진 앞 30보까지 돌격해 들어가 화살을 퍼부었다. 왜구도 만만치 않았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속출했는데도 퇴각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명이 말을 달려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했다. 예상치 못한 돌격에 왜구의 진형이 흔들렸다. 홍색 투구를 쓴 왜장 하나가 홀로 버티고 있었다.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켰고, 왜장은 그대로 쓰러졌다. 지휘관이 쓰러지자 왜구의 사기가 꺾였다. 조선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했고, 목을 벤 왜병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승리한 김수문이 장계를 올렸다는 내용이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7월 6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제주목사 김수문의 보고를 받은 명종은 크게 기뻐하며 김수문의 벼슬을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 치마돌격대원들에게는 종3품 건공장군의 벼슬이 내려졌다. 이 전투는 제2차 을묘왜변이라 불리며, 제주 대첩으로도 기록되었다. 전라도를 유린한 왜구를 막지 못했지만 제주도에서는 달랐다. 김수문을 중심으로 군인과 백성들이 똘똘 뭉쳐서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도 성을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고,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오히려 강점으로 바꾼 것이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만약 왜구가 제주성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의 남쪽 해안가를 지속적으로 약탈했을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제주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계획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하지만 을묘왜변이 남긴 상처는 깊었다. 조선은 해안 방비와 군비를 점검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포제의 폐단은 계속되었고, 힘없는 백성들만 그 짐을 떠안았다. 제주에서의 승리는 빛났지만, 조선의 군사 시스템은 여전히 허약했다. 그리고 불과 37년 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더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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