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소음이 멈추는 곳, 교황청 돌벽에 새겨진 한강의 육성 [헬로스테이지]

데일리안(프랑스, 아비뇽) =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7.18 07:55  수정 2026.07.18 07:56

'작별하지 않는다' 2인 낭독극으로 아비뇽페스티벌서 선봬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 한국 배우 이혜영 출연

한강 작가도 직접 무대에...마지막 대사 소화

프랑스 아비뇽의 거리는 내내 유쾌한 소란으로 가득하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의 버스킹 음악, 쉼 없이 터지는 관객들의 웃음과 환호가 좁은 골목마다 빽빽하게 들어차 기분 좋은 활기를 뿜어낸다. 그런데 거리의 끝, 압도적 위엄으로 광장을 굽어보고 있는 교황청의 높고 두터운 석조 성벽을 넘어서는 순간, 이 모든 흥분은 거짓말처럼 차단된다.


'작별하지 않는다' 낭독극을 마친 (왼쪽부터) 배우 이혜영, 한강 작가, 이자벨 위페르 ⓒ박정선 기자

지난 15일과 16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의 심장부인 이곳에서 낭독극 ‘작별하지 않는다 ― 새(Oiseau)’가 무대에 올랐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1부 ‘새’를 무대로 옮긴 낭독극이다. 원작의 묵직한 텍스트는 프랑스어와 한국어, 두 개의 언어로 교차되며 교황청의 오래된 돌벽에 부딪혀 번졌다.


무대는 프랑스의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의 배우 이혜영의 만남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위페르(경하 역)의 지적이면서도 서늘한 프랑스어 낭독과 이혜영(인선 역)의 밀도 높은 한국어 독백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묘한 호흡을 만들어냈다. 교황청 안뜰을 가득채운 1900여명의 관객들은 자막을 읽는 것조차 잊은 채, 두 배우의 목소리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무대 뒤, 교황청 성벽의 아치형 창문엔 흩날리는 눈(雪)을 형상화한 빛과 바람은 비현실적인 겨울의 풍경을 교황청 한가운데로 고스란히 불러들였다. 관객들은 프랑스 남부의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무대 위에 피어난 서늘한 겨울의 감각에 완전히 동화돼, 소설 속 인물들이 마주했던 시린 기억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서사는 한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 중 하나인 제주 4·3을 관통한다. 하지만 무대는 이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거창하게 연설하는 대신, 지극히 사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출발한다. 손가락을 다쳐 육지의 병원에 입원한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고, 경하가 제주도 집에 홀로 남겨진 작은 새를 구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길을 떠나는 여정이다. 비극의 참상 그 자체보다,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지극한 사랑의 상태’와 생명을 향한 끈질긴 마음을 좇는 원작의 감성이 두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재현됐다.



ⓒ박정선 기자

배우들의 독백이 이어지는 동안 석조 벽면에는 프랑스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 자막이 차례로 새겨졌다. 600년 세월을 버텨낸 유럽의 고성벽 위에 한국의 아픈 역사와 문학적 문장들이 빛으로 새겨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묘한 울림이 있다.


매년 아비뇽페스티벌에 참석해온 한 40대 프랑스 여성은 “한강의 소설을 이미 읽고 왔지만, 이 거대한 야외 무대에서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교차하며 울릴 때의 전율은 완전히 달랐다”며 “한국의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음에도, 상실을 대하는 인간의 지극한 태도가 가슴 깊이 전해져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평소 한국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파리에서 아비뇽까지 단숨에 달려왔다는 대학생 클레어 뒤부아(20)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늘 챙겨 읽는 팬이다. 오늘 이혜영 배우의 한국어 낭독을 들을 때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꽂히는 기분이었요. 뜻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목소리에 담긴 슬픔과 사랑이 그대로 전달되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감격에 겨운 소회를 밝혔다.



ⓒ박정선 기자

이날 공연의 절정은 단연 후반부였다. 두 배우의 낭독이 멈춘 자리에 원작자인 한강 작가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치 못한 원작자의 등장에 객석에서는 조용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강 작가는 소설의 3부 ‘불꽃’에 담긴 인선의 대사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작가의 목소리가 얹어지면서, 새를 구하려던 한 개인의 사적인 슬픔은 미군정의 냉전 논리와 서북청년단의 폭력이 얽힌 제주 4·3의 참혹한 역사적 진실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앞서 쌓아 올린 보편적 감성들이 제주의 아픈 역사 속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눈은 내리고 있었고,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문장을 읊는 한강 작가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극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1900여명의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해 폭발적인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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