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페스티벌서 '한강 작가와의 만남' 진행
“이 세상이라는 차갑고 서서히 녹아내리는 눈 위에 저만의 문장과 발자국을 새겨 넣는 일, 그것이 제가 소설을 쓰는 행위입니다.”
한강 작가는 지난 12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사유의 카페에서 열린 ‘한강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해 서점 운영 경험, 신체 감각의 문장화, 그리고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한강 작가가 아비뇽페스티벌 '사유의 카페'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했다. ⓒ아비뇽페스티벌
한 작가는 지난 2018년부터 운영하다 최근 문을 닫은 동네 서점에 대한 회고로 대담을 시작했다. 10대 시절부터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그는 독자들이 침묵 속에서 책과 만나는 방식을 지켜보고 싶어 서점을 열었다고 밝혔다.
한 작가는 “손님들이 생각에 잠기거나,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거나, 책장을 넘겨보는 모든 몸짓을 유심히 보는 것을 좋아했다”며 “그 평화로운 풍경을 서점 안에서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최근 임대차 문제로 건물을 비워줘야 했던 폐점 직전의 상황도 언급했다. 그는 문을 닫기 직전 단골손님들을 위한 작은 전시를 열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아주 조용하면서도 따뜻하고 다정한 밀어들을 나누며 마지막 수요일을 함께 보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시로 먼저 등단한 후 소설로 영역을 확장한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한 작가는 시가 가진 긴장감과 언어의 정제됨에 매력을 느꼈으며, 이후 소설을 쓰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통로를 얻었다고 전했다. 그는 “혼자 방에서 글을 쓸 때는 철저히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며 “작가가 되고 제 글이 세상에 나가 독자들과 만나면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작품 고유의 분위기와 감각적 잔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창작 방법론을 제시했다. 한 작가는 소설을 시작할 때 언어보다는 대개 어떤 중요한 이미지나 장면에서 출발한다면서 “글을 쓸 때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모든 신체적인 감각들을 문장 속에 어떻게든 집어넣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겨울의 추위가 피부에 닿을 때의 느낌,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 상처를 입었을 때의 통증이나 따스한 온기 같은 모든 감각을 문장 속에 밀도 높게 녹여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구조와 집필 의도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해당 소설은 서울에서 제주로 향하는 수평적 여정, 과거의 역사적 기억 속으로 침잠하는 수직적 하강, 그리고 영적 교감을 나누는 종결부의 3장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한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과거의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은 그 비극적인 사건 자체보다도, 그 안에서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눈이 내리는 벌판이라는 차갑고 시린 배경을 언급하며 “인물들이 겪는 추위와 고통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슬픔을 상징하지만, 그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노력한다. 역설적으로 가장 뜨거운 사랑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성격 지었다.
대담은 ‘눈 위에 글을 쓰는 방법’이라는 문학적 태도에 대한 질문으로 마무리됐다. 한 작가는 눈이 가진 유한성과 쉽게 오염되고 사라지는 성질에 주목하며, 작품을 집필하는 7년 동안 겨울마다 눈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거나 발자국을 깊게 남겨보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밝혔다.
한 작가는 “우리의 삶 역시 영원하지 않고 눈처럼 쉽게 바래거나 사라져 버리지만, 우리는 그 유한한 삶 속에서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기 위해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한다”며 “눈 위에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유한한 운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기억과 사랑의 몸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의 삶이 언젠가 눈처럼 녹아 사라질지라도, 우리가 그 위에 새겨 넣었던 다정한 기억과 사랑의 문장들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전하며 대담을 마쳤다.
한편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모티브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새’는 아비뇽 교황청극장에서 7월 15일과 16일 공연한다. 연출은 줄리 델리케 감독이 맡았고, 한국 배우 이혜영과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낭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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