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페스티벌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원작 낭독극 '새' 공연
"배제고 논란 같은 사회적 혐오, 충격이 충격을 덮고 쓸려가선 안 돼"
"노벨상 이후 점점 관심 멀어져 마음 가벼워져… 똑같이 살고 있다"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프랑스 아비뇽의 한여름. 이 뜨거운 축제의 한복판에서 소설가 한강은 가장 시린 제주의 겨울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를 공식 초청 언어로 선정한 올해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그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1장을 바탕으로 한 낭독 공연 ‘새’(Oiseau)가 무대에 오른다.
한강 작가 ⓒ아비뇽페스티벌
지난 15일 아비뇽에서 만난 한강 작가는 땀 흘리는 한여름에 아주 추운 겨울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이 역설적인 무대를 두고 “어둠과 미세한 불빛 속에서 겨울의 서늘함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라며 덤덤한 기대를 전했다.
‘새’는 한국 작가의 문장을 극화하는 대신 원작 그대로 낭독하는 형식을 취했다.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가 직접 텍스트를 발췌했고, 프랑스의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의 이혜영 두 배우가 각각 자국의 언어로 교차 낭독하는 방식으로 공연이 구성됐다. 한강 작가는 개막 직전 진행된 리허설을 참관하며 비로소 텍스트가 입체적인 공연 예술로 전환되는 과정을 확인했다.
“제 소설을 극화하기보다 문장 그대로 ‘낭독’한다는 점이 신선해 결정을 내렸습니다. 1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연출가가 어떤 부분을 왜 골랐는지 리허설을 보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이어지는 두 배우의 이야기가 놀라울 정도로 잘 연결되었습니다. 제가 쓴 문장들이 배우들의 몸을 돌고 나와 공간에 퍼지는 감각은 처음이어서 무척 특별했습니다.”
눈으로만 쫓던 활자가 배우의 신체와 목소리를 얻을 때 발생하는 변화에 대해서도 대화가 이어졌다. 독서가 철저히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리듬의 변주라면, 극장 공간에서의 낭독은 현장에 모인 공동체가 동일한 호흡을 공유하는 집단적 체험으로 확장된다는 취지다.
“언어에는 원래 음악적인 힘이 있어서 소리 내지 않고 읽을 때도 머릿속에 나름의 리듬이 만들어집니다. 반면 배우가 낭독할 때는 배우의 해석이 들어갑니다. 제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장이 해석되고, 그것이 배우의 몸을 통과해 내보내는 음악적 요소와 중첩되면서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 생겨납니다. 책을 읽는 것이 인물의 경험 속으로 온전히 혼자 들어가는 개인적인 경험이라면, 연극은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몰입하고 감각을 나누는 공동의 경험입니다.”
아비뇽 페스티벌 역사상 한국의 창작자와 배우가 나란히 교황청 명예의 뜰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한 최석규 국제공연예술제 감독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전부터 티아구 호드리게스 아비뇽 예술감독에게 이 작품을 소개해 왔다”고 설명했다. 최 감독은 “수상 이후 쏟아지는 관심으로 제안에 부담도 따랐지만, 낭독이라는 형식을 통해 글 본연의 힘이 온전히 전해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적극 추천했다”고 배경을 보탰다.
'작별하지 않는다-새' 낭독 공연을 선보이는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 배우 이혜영 ⓒ아비뇽페스티벌
현지 기온이 40도 안팎을 오르내리는 기후적 조건은 역설적으로 작품이 가진 차가운 정서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요소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흔인 제주 4·3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작가는 무거운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충돌시키기보다 미시적이고 연약한 사물들의 이미지를 겹쳐놓음으로써 비극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
“워낙 오래된 돌 성벽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 밤이 주는 특유의 힘이 있을 겁니다. 비록 너무 더운 계절에 아주 추운 겨울 이야기를 봐야 하지만, 어둠 속의 미세한 불빛과 배우들이 존재할 때 그 겨울의 서늘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쓸 때 눈송이나 새의 깃털, 촛불의 흔들림처럼 아주 가볍고 부드러운 감각들을 통해 비극에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연출가 역시 그 부드러움과 차가움이 담긴 텍스트를 선택했기에 외국의 독자들에게도 그 감각이 보편적으로 와닿을 것이라 봅니다.”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공유하지 않는 해외 관객들이 이 국가적 트라우마에 공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도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굳이 사전 지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서사의 흐름과 인물의 여정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보편적인 인간적 심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뢰를 보였다.
“독자들이 주인공 경화의 여정을 따라 눈보라를 뚫고 제주 중산간의 집까지 가다 보면, 아무런 준비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건과 만나게 됩니다. 외국의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않았더라도, 이 사건은 단순히 한국의 특수한 비극이 아니라 인류가 오랜 역사에 걸쳐 도처에서 반복해 온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이해를 가로막는 특별한 문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국내외 사회적 갈등과 최근 교육 현장에서 발생한 배제고 야구부 사태 등 일상화된 배제의 문제로 확장됐다. 작가는 공동체 내부에 쌓인 반목을 단순히 현상으로 방치하기보다 구조적인 결함을 환기하는 경고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짚었다. 자극적인 폭력성에만 주목하다가 근본적인 논의 없이 사건이 묻히는 소모적 구조에 대한 경계다.
“혐오는 참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분명한 문제’라고 함께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혐오의 시대에서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다 같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 역시 우리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우리 사회는 늘 하나의 충격이 다음 충격에 덮여 그냥 휩쓸려 가버리곤 합니다. 자극적인 놀라움으로 끝내지 말고,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이를 포착해 다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한강 작가 ⓒ아비뇽페스티벌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수상한 이후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피로감과, 이른바 ‘K-문학’의 확산을 바라보는 문화 산업적 관점에 대한 질의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작가는 수상 이후 쏟아진 급작스러운 관심에 직면했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도 점차 일상의 궤도를 회복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자국의 언어나 문학 자산을 국가 간의 우열을 가리는 시장 논리로 재단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솔직히 노벨상 수상 직후에는 많이 부담스러워서 칩거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마다 새로운 수상자가 나오니 점점 관심이 저에게서 멀어질 것이고, 실제로 요즘은 마음이 많이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제 삶에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고 그냥 이전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한국 문학이라는 장 속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우리 문학이 너무나 소중하고 해외 서점에 한국 섹션이 생기는 것도 반갑지만, 언어를 어떠한 경쟁력이나 우열의 개념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국가나 자원의 관점으로 문학을 재단하려는 시장주의적 시선에 대한 조용한 성찰로 귀결되었다. 그에게 언어는 국경을 넘어 시장을 점령해야 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언어는 곧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모국어를 통해 세계와 만나고 자신을 형성해 나갑니다. 축제에서 매년 특정 언어를 선정해 집중하는 것 역시 언어가 가진 음악적이고 근원적인 성격에 주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어는 진실을 담기도, 때론 감추기도 하며 비명이나 소설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을 행하고 읽고 듣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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