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억 시장 호황 이면엔 수억 원대 '임금 체불' 멍에
정영주 초대 이사장 등 중견 베테랑들 전면 등판
개인이 감당하던 소송·불이익, 단체 교섭력으로 돌파
한국 뮤지컬 시장의 지난해 티켓판매액은 약 5000억원에 이른다. 산업의 외형은 팽창했으나, 무대에 서는 배우들을 보호할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에 임금 체불과 불공정 계약 등 누적된 업계 관행에 대응하기 위해 배우들이 직접 결집했다.
정영주 초대 이사장을 주축으로 한 한국뮤지컬배우협회는 지난 17일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을 알렸다. 이사진에는 이건명·송용진·김아선·양준모·김아영이, 감사에는 안유진이 이름을 올렸다. 남경읍·전수경·신성우·안재욱 등 배우 80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최정원·정성화·신영숙 등도 뜻을 함께했다.
협회 출범의 배경에는 반복되는 임금 체불이 있다. 최근 대극장과 중소극장을 가리지 않고 제작사의 자금난으로 인한 미지급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다. 2024년 전국 투어를 한 뮤지컬 ‘친정엄마’는 제작사가 배우와 스태프의 임금 약 4억원을 체불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밀린 돈을 받으려고 사옥을 찾아간 한 스태프는 오히려 ‘무단침입’이라는 내용증명을 받았다.
정영주 한국뮤지컬배우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뮤지컬배우협회
올해 3월 조기 폐막한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에서는 배우와 스태프 63명이 성명을 내고, 1차 공연과 연장 공연을 합쳐 미지급 금액이 약 2억 2000만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해 공연한 ‘드림하이 시즌2’는 주연 영재를 비롯한 배우와 댄서들의 출연료를 제때 지급하지 않아 소송으로까지 번졌고, 제작사는 지난 8월에야 정산 완료를 발표하고 사과했다.
이러한 사태의 피해는 대부분 프리랜서 신분인 배우들, 특히 앙상블과 조연 및 신인 배우들에게 집중된다. 현행 법제도상 독립된 사업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근로기준법의 온전한 보호를 받기 어렵다. 제작사가 흥행 실패나 자금난을 이유로 폐업하거나 연락을 끊으면 개인이 기댈 수 있는 법적 수단은 제한적이다. 배우가 사비와 시간을 들여 민사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승소 후 실제 추징까지 이어지기 어렵다.
법적 한계보다 배우들의 입을 막는 것은 업계 내부의 분위기다. 캐스팅이 인맥과 평판에 크게 좌우되는 구조에서, 체불을 공론화하거나 소송을 제기한 배우는 차기작에 캐스팅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을 떠안는다. 적지 않은 배우들이 밀린 출연료를 포기하고 침묵해 온 이유다.
협회가 내건 목표는 개인이 떠안던 위험을 함께 지는 것이다. 협회는 출연료 미지급과 계약 불이행 등 반복되는 현안에 대해 배우들에게 법률 지원을 하고, 관련 사례와 자료를 모아 표준계약 문화를 확산하며 법·제도적 개선을 이끌겠다고 밝혔다. 배우 개인이 제작사를 상대하는 대신 협회가 공동 대응 창구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또 계약·세무·회계 등 교육 콘텐츠 개발, 신진 배우 발굴과 경력 관리로도 활동 폭을 넓힐 계획이다.
지난 17일 진행된 한국뮤지컬배우협회 창립총회 ⓒ한국뮤지컬배우협회
정영주 이사장은 “그동안 배우 한 사람이 혼자 감당했던 문제를 이제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는 것부터가 중요한 시작”이라고 말했다. 선후배와 주연, 앙상블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배우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협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향후 과제는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 법적 지위 확보다. 협회는 조속한 시일 내에 주무관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공식적인 사단법인 인가를 거쳐야 정부 기관 및 공연제작사협회 등 사측 단체를 상대로 공식적인 교섭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술인 고용보험 정착, 임금 지급 보증 제도 도입 등 산업 전반의 제도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협회는 배우의 권익 보호가 제작사와의 대립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날 창립총회에는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 한승원 회장과 한국뮤지컬협회 이종규 이사장도 참석했다. 정 이사장도 제작사와 배우를 “같은 무대를 만드는 동반자”로 규정했다. 투명한 계약과 제때 지급되는 출연료는 안정적인 공연 제작의 전제 조건이다. 배우와 제작사가 함께 합리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다면, 한국 뮤지컬은 외형 성장을 넘어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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