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현보와 홍복원의 난 – 평양의 마지막 반란 [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 역사㊺]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9.22 11:03  수정 2026.09.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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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인데 이 단어 안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시키는 대로 하는 이유는 바로 위급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고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군대를 보내서 나와 가족들을 보호하고, 질병이 퍼지면 의사를 보내서 치료해 주고, 홍수나 재난이 일어나면 보살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국가를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몽골이 쳐들어왔을 당시 고려의 상황이 바로 ‘각자도생’이었다. 사납고 흉폭한 몽골군의 공격에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강화도에 쳐박힌 임금과 최우는 육지가 생지옥이 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수탈에만 여념이 없었다. 기껏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이 바다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해서 섬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좁아터진 섬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면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할 지에 대한 대책 같은 건 없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강제로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섬에 들어가게 된 백성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고통까지 더해진 백성들이 고려를 등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조위총과 묘청의 난으로 크게 타격을 입은 고려 제2의 도시 서경이 있었다. 고종 20년인 서기 1233년 5월 자 고려사 세가에 실린 기록이다.


강화 전쟁기념관에 있는 강화성 축조 모형 ⓒ직접 촬영

서경 사람 필현보(畢賢甫)와 홍복원(洪福源) 등이 선유사 대장군 정의와 박록전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낯익은 이름 두 개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는 필현보, 또 하나는 정의다. 16년 전인 서기 1217년 6월, 서경은 최광수가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며 일으킨 반란에 일어나고 있었다. 청주 사람이자 서경에서 관리로 일하던 정의는 최광수를 제거하기 위해 교위들을 이끌고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틈을 봐서 소매에 넣어둔 도끼로 최광수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고려 조정은 반란을 진압한 정의와 그의 부하들에게 포상을 내리는데 그 때, 포상을 받은 사람 중에 필현보도 들어있었다. 그런 그가 16년 만에 오히려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사이에 서경, 그리고 고려의 상황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거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몽골이 이미 여러 차례 고려를 공격했고, 임금과 최우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강화도로 천도해 버린 상태였다. 나머지 육지의 백성들과 관리들은 배신감과 함께 몽골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서경은 개경에 대항해 여러번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을 당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위상이 하락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 처한 서경 사람들에게 필현보와 홍복원이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투항할 것을 설득한다. 아마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는 식의 설득에 이대로 가다간 다 죽을 것이라는 협박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설득이 성공하면서 서경은 고려 조정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소식을 들은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먼저 선유사를 파견하기로 한다. 지목된 인물은 17년전 그와 함께 최광수를 죽인 대장군 정의였다. 아마 안면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서 반란을 포기할 것을 설득하라는 뜻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설득은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정의를 본 필현보는 그의 소매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필현보와 홍복원은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대장군 정의를 비롯한 선유사 일행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설마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 조정이 무력 진압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저지른 행동 같았다. 하지만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절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그해 12월 최우는 행동에 나선다.


최우가 가병 3,000명을 보내어 북계병마사 민희와 함께 서경을 토벌하고 필현보를 체포하여 서울로 보내어 시가에서 허리를 베어 죽였다.

몽골군과의 전투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최우의 가병들이 무려 3000명이나 동원되어서 서경을 공격했다. 아마 북계 병마사가 이끄는 고려의 정규군도 합류했을 것이다. 진압군의 맹렬한 공격에 서경성은 함락되었고, 필현보는 체포되어서 강화도로 끌려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는데 목을 베는 참수형보다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허리를 베어서 죽이는 요참형에 처해졌다. 최우가 자신에게 반항한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준 것이다. 반란을 일으켰던 서경성은 폐허가 되어버렸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근처의 섬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서경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서경이 고려에 대항해서 일으킨 마지막 반란의 참혹한 결과물인 셈이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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