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암화명(柳暗花明), 대북정책에 지름길은 없다 [박은주의 한반도 전략 시선]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9.23 14:07  수정 2026.09.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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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수복의 구간을 건너뛰려는 정부

비핵화 미루고 제재 완화·접촉 자유화·의료 지원 먼저 내미는 조급함

지금 필요한 것은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도착하는 것'

이재명 대통령이 2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1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끝이라고 생각한 곳이 끝이 아니었고, 새로운 길이 열렸다.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가 '산중수복의무로, 유암화명우일촌(山重水复疑無路,柳暗花明又一村)'이라고 노래했다. 산이 겹치고 물이 굽이쳐 길이 없는 듯 보였으나, 짙푸른 버드나무 그늘을 뚫고 환한 꽃을 마주하니 또 한 마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의무로'의 절망을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우일촌'이 온다는 순서에 있다. 숲을 억지로 헤집거나, 존재하지 않는 지름길을 내거나, 발걸음도 닿기 전에 도착을 선언한다고 해서 그 마을에 이를 수는 없다.


지금 남북관계는 바로 그 '의무로'의 구간에 있다. 북한은 신형 미사일을 계속 쏘아 올리고, 대화의 문은 굳게 닫혀 있으며, 남북협력기금 집행률은 1%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최근 움직임은 이 어둡고 지난한 구간을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지름길'을 내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어제 전해진 이재명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는 그 조급증의 가장 위험한 단면을 드러냈다. 이 대통령은 "현 상황에서 비핵화를 목표로 하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효과적이지 않은 제재와 추가적인 핵무기 및 ICBM 기술 개발 중단을 교환하는 거래가 상당히 가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완전한 비핵화를 당장의 목표로 삼지 않고, '핵동결'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자는 구상이다. 현실적 접근이라는 명분이지만, 이는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용인하고, 보상부터 주자는 위험한 신호로 읽힐 수 있다. 같은 시기 한·미·일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 것과도 엇박자를 낸다.


이러한 조급함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정부는 1990년 「남북교류협력법」 제정 이후 36년간 유지돼 온 ‘접촉 신고 거부권’을 삭제하는 데 동의했다. 사전 안전장치를 스스로 풀어버린 셈이다. 또한 북한의 호응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평양 강동군병원에 93억 원 규모(1431개)의 의료장비를 지원할 준비도 마쳐 두었다고 한다. '일단 문을 열고 보자', '먼저 선의를 보여주자'는 속도전이 원칙을 앞지르고 있다.


그러나 '유암화명'의 교훈은 명확하다. 짙은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샛길을 파고들면, 정작 환한 꽃이 피어 있는 마을은 영영 지나칠 수 있다. 남북관계에서 '또 하나의 마을'은 상대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와 최소한의 신뢰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조건을 생략한 채 속도를 내면, 그것은 새로운 길이 아니라 영구적인 핵 인질이라는 또 다른 막다른 골목이 될 위험이 크다.


당장은 답답하고 지난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 한반도에서 진정한 국면 전환은 섣부른 타협보다 인내와 원칙이 쌓인 자리에서 찾아왔다. 어두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오히려 환한 꽃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빨리 도착하는 기교'가 아니라 '제대로 바르게 도달하는 인내'다. 산이 겹치고 물이 굽이치는 이 구간을 조급하게 건너뛰려 하지 말자. 버드나무 그늘은 여전히 깊고 어둡지만, 그 너머에 꽃이 핀 마을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마을은, 억지로 샛길을 내는 이가 아니라 어둠을 뚫고 묵묵히 걸어 들어간 이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글/ 박은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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