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실루엣 [조남대의 은퇴일기(108)]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9.22 17:10  수정 2026.09.2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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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오후는 짙은 원색으로 물든다. 순백의 독참파 꽃, 메콩강의 탁한 황토물, 승려들의 주황색 승복이 한데 어우러져 눈앞에 선명한 색채의 풍경을 펼쳐 놓는다. 색의 향연 속에서, 열 살배기 손녀는 무릎에 하얀 면포를 펼치고 고개를 숙인 채 바늘을 쥔다. 까만 눈망울은 천을 가르는 실의 움직임을 응시하며, 자신만의 투명하고 완벽한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탁발하는 스님들의 모습ⓒ

손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안타까운 열병을 앓고 있다. "나 너 좋아해." 삐뚤빼뚤한 글씨로 수줍게 건넨 편지에 "나도 그래, 이 이야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답장이 돌아왔던 날, 아이의 조그만 우주에는 수천 송이 꽃이 한꺼번에 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풋풋하고도 애틋한 첫사랑의 편지는 7월 중순을 끝으로 만남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마음을 나눈 그 소년이 부모를 따라 머나먼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별을 앞두고 양가 어머니가 마련한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소년의 손에 쥐여주기 위해 손녀는 한국에서 보내준 천 위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성껏 수를 놓는 중이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메시지ⓒ

손녀는 소년의 이야기만 나오면 입가에는 웃음이 번지고, 얼굴은 막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처럼 수줍게 붉어진다. 사랑의 온기를 채 느끼기도 전에 헤어짐의 안타까움을 깨달아야 하는 아이. 팽팽한 천을 뚫고 나오는 바늘의 미세한 사각거림이 라오스의 뜨거운 침묵 속으로 잔잔히 번져가고, 하얀 천 위에는 색색으로 소년의 앳된 실루엣이 한 땀 한 땀 새겨지는 중이다. 둥글게 굽은 손녀의 작은 등과, 바늘귀를 꿰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앙증맞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가만히 그려보노라니, 문득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래전 방 한구석에 깃들던 또 다른 바느질의 풍경이 아스라이 겹쳐온다.


남자 친구에게 줄 자수를 놓으며 행복해하는 손녀 AIⓒAI로 제작

딸아이가 손녀 또래였을 무렵이다. 아이는 제 방에서 조그만 손으로 무언가를 쉼 없이 깁고 꿰매기 시작했다. 서툰 솜씨로 색실을 엮어 자기 베개만 한 쿠션을 만들고 있었다. 열린 방문 틈으로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나의 마음은 내심 뭉클하고도 달콤했다. '드디어 딸이 밤잠을 설쳐가며 직접 만든 선물을 받아보는 날이 오는구나.' 다가올 내 생일과 어버이날을 달력에 짚어보며, 짐짓 모른 척 부푼 기대 속에 바늘땀으로 수가 새겨진 쿠션이 내 품에 안길 날을 기다렸다.



남자 친구에게 줄 방석을 만들고 있는 딸 AIⓒAI로 제작

하지만 며칠 뒤, 완성된 그 작품은 집 안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딸아이의 방을 슬쩍 둘러보아도 흔적이 없다. 알고 보니 알록달록한 쿠션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반 사내아이 가슴에 안겨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헛헛함과 묘한 배신감, 어설픈 질투와 서글픔이 뒤섞여 밀려오던 순간, 쓴웃음을 삼키며 비로소 깨달았다. 품 안의 여린 아이인 줄만 알았던 딸이 어느새 ‘아빠’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넘어 자신만의 은밀하고도 넓은 우주를 향해 바늘을 찌르고 실을 당기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아빠라는 세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내 곁을 떠나 자기만의 세계를 지어 올리는, 눈부시고도 먹먹한 성장의 증명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남자 친구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딸 AIⓒAI로 제작

나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만 품고 있던 소심했던 모습이 실루엣처럼 겹친다. 초등학교 6년이라는 길고 애틋했던 시간 동안 나는 마음에 담은 소녀와 단 한 번도 제대로 눈길을 맞추지 못했다.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등하교 때나 쉬는 시간에 가슴 졸이며 먼발치에서 단정하게 자른 까만 앞머리가 흩날리는 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고백은커녕 쿵쾅거리는 내 마음을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기만 했던 소심한 사내아이, 그것이 어린 날의 나였다. 나의 첫 앓이는 '마음'이라는 형형색색의 실을 품고도, 끝내 하얀 천 위에 단 한 땀의 수도 놓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의 바람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린 줄만 알았다.



먼발치에서 좋아하는 여자애를 바라보는 작가 AIⓒAI로 제작

반세기라는 아득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 까까머리 소년이 흰머리 선연한 초로가 된 어느 날, 친구를 통해 그녀와 기적처럼 전화가 닿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낯설면서도 기억 저편을 건드리는 아스라한 음성에 나는 12살의 소년으로 돌아가 버렸다. 반백 년의 세월 동안 명치끝에 묵혀두었던 한마디를 불쑥, 싱겁게 꺼내놓고 말았다. "사실, 국민학교 다닐 때 너를 좋아했어. 먼발치에서 보면서 말 한마디 못 했지만."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당황하면 어쩌나, 주책이라 흉보면 뭐라고 변명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할 때, 수화기 너머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래 몰랐네. 그럼 그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이 바보야." 인생의 가을을 걷고 있는 여유로움이었다.



반백 년이 지나서 초등학교 여자 동기에게 전화하는 작가 AIⓒAI로 제작

가벼운 핀잔 섞인 한마디에 6년의 아쉬움을 갖고 건너온 50년의 세월이 봄눈 녹듯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가슴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따뜻한 안도로 번져나갔다. 그날의 다정했던 통화로 어린 서운함에 대한 보상은 충분하였다. 그래서일까. 그날을 끝으로, 더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아련하게 수놓아진 그녀의 무늬는 그대로 남겨지겠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해 애태우며 바라보던 시절의 청순한 모습으로 언제나 거기 멈춰있을 것이다. 그 모습이 변하지 않은 채 기억 속에 머물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않을까.


7월이 지나고, 라오스의 흰 독참파 꽃잎이 툭툭 떨어질 때쯤, 소년은 비행기를 타고 먼 남반구의 낯선 나라로 떠나고, 두 아이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아득한 거리가 놓일 것이다. 하지만 이별이 두 아이가 나눈 사랑의 색채를 함부로 바래게 하지는 못하리라. 훗날 청년이 된 소년이 낡은 상자를 열었을 때, 자수는 라오스에서 함께 보낸 시간과 생애 처음 가슴 설레던 시절을 오래된 사진처럼 다시 불러내지 않을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반세기 만에 마침표를 찍은 노회한 짝사랑도, 아비의 기대를 배신하고 짝꿍의 가슴에 안겨졌던 딸아이의 맹랑한 쿠션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삶이라는 거대한 직물 위에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들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얀 천 위에 각자의 색깔로 서툰 바느질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 바늘땀들이 켜켜이 모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인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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