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샤 키스 명곡, 청춘의 서사로…뮤지컬 ‘헬스키친’ [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9.14 13:21  수정 2026.09.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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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까지 GS아트센터

앨리 역에 김수하, 손승연, 박지원

R&B스타 앨리샤 키스 자전적 성장 서사

“널 지키려고 이러는 거야.”

“날 질식시키려고 이러는 거겠지.”


엄마에게 낡은 아파트는 딸을 지키는 요새지만, 열일곱 살 딸에게 그곳은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감옥이다. 뮤지컬 ‘헬스키친’은 팝스타 앨리샤 키스가 유년을 보낸 1990년대 뉴욕 맨해튼 플라자에서 출발한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17세 소녀 앨리가 엄마의 과도한 통제 속에서 겪는 갈등과 방황, 그리고 피아노를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극을 이끄는 힘은 복잡한 서사 대신 인물 간의 관계와 보편적인 성장통에서 나온다. 페인트공이자 거리의 버킷 드러머 넉, 아파트 지하 연습실 ‘엘링턴 룸’에서 만난 음악가 미스 라이자 제인은 앨리를 집 밖으로 끌어낸다. 넉은 앨리에게 첫사랑이자 자신이 모르던 도시의 얼굴이고, 라이자 제인의 피아노는 앨리가 감정을 쏟아부을 유일한 통로가 된다.


뮤지컬 '헬스키친' ⓒ에스앤코

작품은 이 설익은 해방감 뒤에 1990년대 뉴욕의 과잉 치안과 인종 편견, 부재한 아버지의 무책임함, 멘토의 죽음 같은 상실을 연이어 배치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아이러니는 넉 일행을 건물에서 몰아내려 경찰을 부른 사람이 다름 아닌 앨리의 엄마 저지라는 설정이다. 이 사건 이후로 넉은 계속되는 경찰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애틀랜타로 떠난다. 딸을 지키려는 보호 본능이 딸이 사랑한 사람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는 셈이다.


작품에 배치된 앨리샤 키스의 히트곡과 신곡들은 이질감 없이 서사의 호흡에 맞물린다. 오리지널 곡인 ‘더 리버’(The River)는 좁은 방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앨리의 갈망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엄마 저지의 ‘세븐틴’은 자식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현실적 불안을 대변하며, 대표곡 ‘걸 온 파이어’(Girl on Fire)는 원곡의 성공 찬가가 아닌 첫사랑과 음악을 동시에 마주한 10대의 벅찬 감정으로 재해석된다. 부모의 엇갈린 미련을 담은 ‘폴린’(Fallin'), 부녀 사이의 서먹한 거리를 보여주는 ‘이프 아이 에인트 갓 유’(If I Ain't Got You)의 건반 연주도 극적 장치로 알맞게 기능한다.


뮤지컬 '헬스키친' ⓒ에스앤코

미스 라이자 제인이 부르는 ‘퍼펙트 웨이 투 다이’(Perfect Way to Die)는 거리에서 스러져간 이들을 추모하며 극의 사회적 무게를 더하고, 후반부 모녀가 함께 완성하는 ‘노 원’(No One)은 통상적인 연인의 사랑 노래에서 벗어나 서로의 결핍을 보듬는 화해의 합창으로 전환된다. 피날레를 장식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Empire State of Mind)는 거친 도시가 결국 자신을 키워낸 토양이었음을 확인하는 마침표 역할을 한다.


무대 연출은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철제 구조물로 도시의 질감을 압축한다. 고층 아파트 외벽과 발코니를 연상시키는 구조물이 오르내리며 고층 건물의 수직적 폐쇄성과 뉴욕 거리의 수평적 개방감을 효과적으로 나눈다. 차가운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거리, 지하 엘링턴 룸의 따뜻한 호박색 조명은 인물들의 심리적 공간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무대 한쪽에 자리한 피아노 소리와 넉이 두드리는 플라스틱 버킷의 타격음은 라이브 밴드 연주와 맞물려 현장감을 높인다. 안무 역시 정형화된 쇼뮤지컬의 동작을 탈피해 1990년대 힙합, 하우스, 스트리트 스텝을 앙상블의 몸짓에 녹여냈다. 인물들이 바닥을 구르고 발을 구르며 만들어내는 리듬은 거리 전체가 하나의 타악기처럼 기능하도록 만든다.


뮤지컬 '헬스키친' ⓒ에스앤코

특히 앨리 역의 김수하는 인물의 거친 성장통을 과장 없이 소화하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10대 캐릭터를 표현할 때 빠지기 쉬운 인위적인 어리광을 배제하고, 통제에 짓눌린 10대의 날 선 말투와 어설픈 걸음걸이를 솔직하게 꺼내놓는다. 가창에서도 정통 뮤지컬의 곧고 단단한 벨팅에만 의존하지 않고, 호흡을 섞어 소리를 긁어내거나 말하듯 비트를 타는 R&B 특유의 결을 자연스럽게 살려낸다. 이는 앨리샤 키스의 멜로디가 대사와 겉돌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돕는다. 격렬한 스트리트 댄스를 소화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가창을 이어가는 호흡은 극 후반부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바탕이 된다. 앨리 역은 김수하와 함께 손승연, 박지원이 나눠 연기한다.


뮤지컬 ‘헬스키친’은 한 유명 가수의 과거를 되짚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관성에 머물지 않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청소년기의 통증과 가족 간의 이해라는 보편적인 서사를 단단하게 만들어 낸 작품이다. 결말에서 앨리는 엄마와의 관계가 여전히 삐걱거린다고 털어놓는다. 다만 전보다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다고 말한다. 갈등을 말끔히 봉합하는 대신 딱 그만큼만 나아진 자리를 보여 주는 정직함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공연은 11월 8일까지 GS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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