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다시 선 무대…전미도가 보여준 단단한 ‘니나’ [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8.22 10:42  수정 2026.08.22 10:42

극단 맨씨어터 연극 ‘갈매기, 8월 31일까지 티켓링크 1975 씨어터

물러서는 몸짓과 차오르는 호수…엇갈린 마음들의 거리 시각화

22년 만에 주역 된 임철수부터 박호산까지…시간의 두께가 만든 앙상블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갈매기’는 원하는 삶에 닿지 못한 채 엇갈리는 인간들의 욕망과 결핍, 그리고 이를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다룬 작품이다. 서울 광진구 티켓링크 1975 씨어터에서 막을 올린 극단 맨씨어터의 이번 공연은 원작의 묵직함을 지키면서도, 인물들 사이의 어긋난 관계와 심리적 거리감을 무대 위에 명확하게 보여준다. 특히 15년 만에 다시 니나 역을 맡은 배우 전미도의 연기가 극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고 있다.


연극 '갈매기' ⓒ극단 맨씨어터


공연이 시작되면 검은 옷을 입은 마샤와 교사 메드베젠꼬가 무대에 나온다. 서로 말을 나누지만 가까워지지 못하고 자석의 같은 극처럼 밀려나는 두 사람의 움직임은, 작품 전체에 흐르는 엇갈린 관계를 단번에 보여준다.


무대 위에 세워진 수십 개의 자작나무와 널찍하게 비워둔 공간 역시 인물들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대사 사이의 긴 침묵 대신 인물들의 움직임과 시선을 통해 마음의 거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관객이 이야기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번 무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5년 만에 니나로 돌아온 전미도다. 처음에 나이 때문에 출연을 망설였다고 밝혔던 그는, 오랜 시간 쌓아온 연기 내공을 바탕으로 훨씬 더 깊이 있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극 초반 전미도는 배우를 꿈꾸는 순수한 시골 처녀의 모습을 밝게 그린다. 하지만 유명 작가 뜨리고린(이동하 분)을 만나면서 생기는 야심과 불안을 자연스럽게 섞어내며 앞으로 닥칠 비극의 복선을 촘촘하게 쌓는다.


연극 '갈매기' ⓒ극단 맨씨어터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4막이다. 사랑에도 실패하고 아이까지 잃은 채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니나는 이전처럼 마냥 불쌍하게 무너지는 모습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갈매기예요”라고 울먹이다가 “아니, 나는 배우예요”라고 힘주어 말하는 장면에서, 전미도는 슬픔에만 젖어 있는 대신 자신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고통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그의 눈빛은 깊은 울림을 준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호흡도 작품을 풍성하게 만든다. 과거 뜨리고린 역을 맡았던 박호산이 나이가 들어 의사 도른 역으로 출연하고, 22년 전 단역으로 출발했던 임철수가 주역인 뜨레쁠레프를 맡아 극을 이끄는 등 배우들의 세월 변화가 작품 속 인물들과 잘 맞아떨어진다.


임철수는 인정받지 못한 젊은 작가의 불안과 분노를 생생하게 표현하며 전미도와 좋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이동하의 차분하면서도 이기적인 연기, 우현주·양소민의 속물적인 모습, 이대연이 연기한 소린의 쓸쓸한 뒷모습까지 어우러져 극의 무게를 더한다.


연극 '갈매기' ⓒ극단 맨씨어터

극 후반부 무대 바닥에 실제로 물이 차오르는 장면도 눈에 띈다. 뜨레쁠레프는 차오른 물속에 발이 묶인 채 결국 무너져 내리지만, 니나는 찰박이는 물을 밟고 호수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묵묵히 걸어 나간다. 두 청춘의 엇갈린 선택이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부각되는 순간이다.


극단 맨씨어터의 ‘갈매기’는 130년 전 고전을 오늘날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깔끔하게 풀어냈다. 부서지고 상처를 입었어도 다시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나아가는 전미도의 마지막 모습은, 각자의 자리에서 현실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공연은 8월 31일까지 티켓링크 1975 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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