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엿보던 시선, 자신의 양심을 마주하다…연극 ‘타인의 삶’ [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8.21 08:34  수정 2026.08.21 08:34

9월 13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2024년 초연 흥행 이어 1년 8개월 만에 재연

영화의 긴장감을 무대 문법으로

차가운 쇠붙이 헤드폰을 타고 흘러드는 타인의 숨소리, 낡은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 울리는 묵직한 마찰음, 그리고 어둠 속을 가르는 침묵. 2024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던 손상규 연출의 연극 ‘타인의 삶’이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두 번째 시즌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 일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동명 명작 영화를 무대 언어로 옮겨온 이 작품은, 스크린의 서사를 무대만의 치밀한 문법으로 재구성하며 한층 깊어진 긴장감으로 감시와 양심의 경계를 파고든다.


공연은 시작 5분 전, 배우들이 무대 위 의자에 미리 앉아 객석을 응시하는 정적인 풍경으로 출발한다. 막이 오르면 비밀경찰 비즐러 대위의 피 말리는 심문이 이어진다. 잠을 재우지 않은 채 같은 질문을 짓이기듯 반복하며 대상을 옥죄는 심문실은, 비즐러가 객석을 향해 심문 기술을 강의하는 순간 단숨에 비밀경찰학교 강의실로 탈바꿈한다. 관객은 수동적인 관람객을 넘어 슈타지의 학생이자 또 다른 감시자의 위치로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간다.


무대는 화려한 세트 대신 최소한의 소품, 그리고 조명의 대비로 1984년 동독의 공기를 빚어낸다. 차가운 백색광이 내리쬐는 취조·감청의 공간과 따뜻한 노란빛이 감도는 예술가들의 집이 한 무대 안에서 끊김 없이 교차한다. 비즐러는 극의 해설자이자 관찰자로서 무대 가장자리를 오가며 드라이만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문다.


110분의 러닝타임 동안 수십 번의 시공간 전환이 일어나지만, 손상규 연출 특유의 절제된 리듬과 배우들의 밀도 높은 동선은 산만함 대신 팽팽한 밀폐감을 객석에 전달한다.


연극 '타인의 삶' ⓒ프로젝트그룹 일다

극은 “문학을 하려는 것이지 정치적 선동이 아니다”라며 체제와 타협하던 드라이만이, 예술적 동료의 죽음과 “자살자 숫자는 세지 않는다”는 비정한 국가의 위선에 맞서 체제 고발의 글을 쓰기 시작하는 궤적을 좇는다. 그리고 이 선택을 가장 가까이서 기록하고 지켜보는 자는 다름 아닌 감시자 비즐러다.


비즐러의 내면을 뒤흔드는 것은 거대한 설교가 아니다. 타인의 숨소리와 시집, 그리고 존재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두 예술가의 고통을 매일같이 마주하며 그의 견고하던 신념에는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인다. 체제의 부품이던 그는 끝내 드라이만을 지켜내기 위해 감청 보고서를 조작하며 자신의 모든 안위를 내던진다.


인간의 선한 의지는 과연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연극은 그 질문에 대해 ‘타인의 삶을 깊이 응시하는 시간’이라 답한다. 타인의 고통이 더는 남의 것으로 머물지 않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위험을 감수하고 선(善)을 택한다는 진실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초연의 뼈대를 단단히 다졌던 주역들과 새로운 캐스트의 호흡도 흠잡을 데 없다. 감정의 진폭을 극도로 절제한 채 눈빛의 흔들림만으로 양심의 각성을 표현해 낸 비즐러 역의 배우들은 물론, 시대의 억압 속에서 예술혼과 현실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앙상블은 객석의 숨을 멎게 한다. 공연은 9월 13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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