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판은 옮겼지만 만남은 남았다…탑골공원 1년 뒤 [급변하는 도시 속 노인의 낭만①]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10.08 14:28  수정 2026.10.0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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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정비 1년…장기판 사라졌어도 "친구 만나는 공원" 발길

낙원상가 '문화놀이터'로 옮겨간 훈수…8월 이용자 3700명 돌파

쾌적함 선택한 문화놀이터와 익숙함 택한 공원…취향에 따라 갈린 노인의 일상

팽팽했던 장기판은 정갈하게 치워졌지만 노인(국가데이터처의 '고령자 통계'는 65세 이상을 기준으로 고령인구를 구분한다. 이 기획에서는 이들을 '노인'으로 지칭한다.)들이 서로 만나 빚어내던 온기까지 완전히 옮겨간 것은 아니었다.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정겨운 고성과 장기판이 철거된 지 1년여. 거친 야외 바람을 뒤로하고 낙원상가 실내 문화놀이터로 자리를 옮겨 짤깍거리는 장기알 소리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익숙한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오래된 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달 21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담벼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띄었다.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손길들이었다. 공원 안쪽 나무 그늘 아래에는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안부를 묻고 있었다. 활기찼던 장기판 풍경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진 공간의 풍경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영등포에서 매일 이곳으로 출퇴근하듯 찾아온다는 80대 A씨는 공원을 찾는 이유로 단연 '익숙함'을 꼽았다. "여기가 제일 익숙하니까 오죠. 사람도 많고,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도 다 여기로 나오는데 굳이 딴 데 갈 이유가 없잖아요. 옛날엔 장기판 둘러싸고 구경도 하고 장기도 뒀는데 이젠 판이 없어졌으니 그냥 이렇게 앉아서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재미로 나와요."


탑골공원 전경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갑내기 B씨의 반응도 비슷했다. 정비 사업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보다는 공원이라는 장소가 가진 본래의 '만남의 기능'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탑골공원은 단지 장기를 두는 경기장이 아니라 별다른 약속 없이도 언제든 누군가를 만나 외로움을 터놓을 수 있는 도심 속 거점이었다.


종로구는 지난해 8월 탑골공원의 역사적 가치 보존과 질서 회복, 안전 확보를 이유로 장기판과 의자를 정리했다. 이용자들의 자진 철거를 유도하고 환경 정비를 병행하는 방식이었다.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사찰인 원각사 터에 조성된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 등이 남아 있으며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사찰의 흔적과 근대 공원의 역사, 독립운동의 기억이 겹쳐 있는 공간이다.


동시에 탑골공원은 장기판을 중심으로 노인들이 모여 여가를 보내고 사람을 만나는 대표적인 사교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 일대에서 이어진 일부 이용자의 행위였다. 종로구는 음주와 고성방가, 노상 방뇨, 쓰레기 무단투기로 시민 불편이 커졌고 주취 상태에서 시비와 폭력까지 발생했다며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 역사적 공간의 성격과 공공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장기판 정리에 나섰다. 그러나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노인들의 사회적 관계망까지 단번에 철거할 수는 없었다.


문화놀이터 내부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인 낙원상가 1층 '탑골 어르신 문화놀이터'. 이곳은 전혀 다른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탁 트인 실내 공간에는 17개의 장기·바둑 테이블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테이블마다 장기판을 사이에 둔 두 대국자의 날카로운 눈빛과 곁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훈수를 두는 관객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노인들도 까치발을 들고 남의 대국을 구경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종로구가 지난 2월 문을 연 이 문화놀이터는 3월부터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공휴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노상철(70·서울 마포구)씨는 탑골공원 야외에서 두던 시절과 비교해 '쾌적함'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옛날 공원에서는 땀 뻘뻘 흘리거나 추위에 떨면서 장기를 뒀는데 여긴 에어컨도 시원하고 깨끗해서 훨씬 좋아요. 물론 예전처럼 담배 피우거나 커피 마시면서 자유롭게 둘 수는 없고 지켜야 할 규칙들이 생겼지만, 장기 두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만한 환경이 없죠"


강서구 화곡동에서 종로까지 매일 원정을 온다는 C씨 역시 "무료급식으로 식사 해결하고 여기서 친구들과 장기 한 판 두고 가는 이동 동선이 딱 맞는다"며 "집 근처에도 복지관이 있지만 종로에 와야 마음 맞는 친구들과 장기를 둘 수 있다"고 귀띔했다.


문화놀이터 입구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실내 문화놀이터를 찾는 노인들의 발길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종로구 통계에 따르면 개관 첫 달인 2월 1353명이던 이용 인원은 매달 꾸준히 늘어 지난 8월에는 3797명을 기록했다. 개관 후 8개월간 누적 이용자만 1만 8000여명에 달한다. 현장 관계자는 "하루 이용자만 계산해도 평균 100~120명이 찾아온다"고 설명했다.


종로구의 탑골공원 정비 사업은 노인들을 도심 밖으로 몰아낸 것이 아니라 이들의 욕구에 따라 공간 이용 방식을 다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장기라는 취미 활동 자체에 목적이 있는 노인들은 쾌적한 환경과 주말 운영 혜택을 갖춘 실내 문화놀이터로 빠져나갔고 오래된 사람들과의 교류와 휴식이 목적인 이들은 공원 벤치에 남아 햇볕을 쬐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공간은 정비됐고 장기판의 위치는 옮겨갔지만 노인이 타인과 교류하고 시간을 보낼 자리를 찾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공원 나무 그늘 아래와 쾌적한 실내 장기판 사이에서 2026년 오늘을 살아가는 노년의 삶은 저마다의 속도와 방식으로 도시 한복판에서 여전히 뿌리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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