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없이 몸짓으로 빚어낸 55년의 기억…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 [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10.04 12:34  수정 2026.10.04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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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영국 극단 '시어터 리' 오리지널 연출...'연극열전10' 마지막 작품

언어 덜어낸 피지컬 시어터… 치매 환자의 뇌 신경망 시각화

무대에는 서사를 설명하는 대사도,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노래도 없다. 그 빈자리를 배우들의 몸과 라이브 밴드의 연주가 채운다. 조기 치매를 앓고 있는 55세 남성 톰의 기억을 따라가는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언어라는 직관적인 도구를 덜어냈다. 영국 극단 ‘시어터 리’(Theatre Re)의 기욤 피지가 연출한 이 작품은 파편화되고 사라지는 기억의 과정을 몸과 소리로 무대에 옮긴다. ‘연극열전10’의 마지막 작품이자, 세 번째 시즌으로 지난달 18일 개막했다.


극은 톰의 55번째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딸 소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소피가 톰에게 재킷을 입혀주려는 단순한 동작이 방아쇠가 돼 톰의 기억을 무작위로 불러낸다. 자전거를 타며 풋풋한 감정을 나누던 학창 시절, 첫사랑 이자벨라와의 만남, 기쁨으로 가득했던 결혼식 등 삶의 굵직한 순간들이 뒤섞인다. 소피와 이자벨라를 한 배우가 오가며 연기하는 설정은 딸의 얼굴에서 아내의 젊은 날을 겹쳐 보는 톰의 혼란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연극열전

이 기억들은 매끄러운 서사로 이어지지 않는다. 네 명의 배우는 교복 재킷을 강박적으로 입고 벗거나, 일렬로 놓인 책상을 쉴 새 없이 뛰어넘고 엇갈리는 동작을 되풀이한다. 서서히 끊어지고 엉켜가는 톰의 신경망을 안무로 바꿔놓은 것이다.


무대 뒤편에 자리한 2인조 라이브 밴드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퍼커션, 루프 스테이션을 오가는 연주는 배경음악에 머물지 않고 인물의 심리와 기억이 무너지는 속도를 쥐고 흔든다. 톰이 빠져나가는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쓸 때는 빠르고 거친 비트가 몰아치며 무대 위 움직임과 부딪친다.


ⓒ(주)연극열전

반대로, 기억 한 조각이 완전히 사라져 톰이 길을 잃은 순간에는 적막에 가까운 고요가 찾아온다. 음악이 멈춘 무대에 남는 것은 배우들의 가쁜 숨소리와 발소리뿐이고, 그 소리가 기억이 끊겨나가는 단절감을 객석까지 실어 나른다.


톰 역은 박정원·전성우·백성현이 번갈아 맡는다. 나머지 세 배우는 톰 주변의 여러 인물을 오가며 텅 빈 무대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짜 맞춘다. 의자와 책상 같은 최소한의 소품만으로 교실과 결혼식장을 순식간에 오가는 네 배우의 합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정교하다. 기억이 지워질 때 인물이 겪는 혼란과 두려움은 눈물이나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쉼 없이 내달리는 몸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객석에 전해진다.


ⓒ(주)연극열전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치매라는 질병의 비극에 매몰되거나 관객의 동정을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기억이 다 닳아 없어진 뒤에도 남는 인간의 본질과 감정의 흔적을 담백하게 응시한다. 머릿속에 새겨진 사실은 지워져도, 어느 순간 느꼈던 따뜻한 감각과 사랑의 질감은 몸 어딘가에 남는다는 것이다. 공연은 11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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