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3월 1일까지 샤롯데씨어터
그래픽 대신 아날로그 무대로 구현한 아렌델의 눈보라
12곡 신곡 더해 깊어진 자매 서사...어른 관객 울리는 묵직한 여운
“렛 잇 고, 렛 잇 고~”
극장 안을 울리는 폭발적인 고음과 함께 엘사가 손을 뻗자 어두운 무대 위로 새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찰나의 순간, 짙은 대관식 의상이 벗겨지며 1만 개의 크리스털이 박힌 푸른색 얼음 드레스가 눈부시게 빛을 뿜어낸다.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찰나의 ‘퀵 체인지’에 객석 곳곳에서는 어김없이 탄성과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결말도, 노래도, 심지어 의상이 언제 바뀔지까지 이미 다 알고 보는 관객들인데도 눈앞에서 마주한 마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2014년 국내 개봉 당시 애니메이션 최초로 천만 관객을 모았던 디즈니의 ‘겨울왕국’이 마침내 한국 무대에 올랐다. 지난달 13일 서울 잠실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겨울왕국’은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세계 각국을 거쳐 국내에 도착한 대형 신작이다. 화면 속 화려한 3D 그래픽을 한정된 무대 위에 어떻게 옮겨올지 반신반의했던 시선은, 막이 오르는 순간 무대 예술 특유의 생생한 에너지로 깨끗하게 지워진다.
ⓒ에스앤코
공연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아렌델 왕국과 설산의 풍경을 구현해 낸 무대다. 프로젝션 맵핑과 조명, 실제 세트가 빈틈없이 맞물려 관객을 북유럽의 차가운 설산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무대 장치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날로그 기술로 살아난 캐릭터들이다. 뮤지컬 ‘라이온 킹’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커리가 디자인한 순록 스벤과 눈사람 올라프는 객석의 웃음을 책임진다.
스벤은 실제 순록 크기의 탈과 장치 안에 배우가 들어가 네 발로 걷는 독특한 걸음걸이와 숨결까지 표현한다. 반면 올라프는 인형 조종자가 뒤에서 얼굴과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함께 연기한다. 배우의 표정과 호흡이 인형의 움직임과 포개지면서 컴퓨터 그래픽이 줄 수 없는 따뜻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원작의 돌멩이 트롤 대신 북유럽 숲의 정령인 ‘히든 포크’로 재해석된 군단 역시 역동적인 앙상블 안무로 무대의 활력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번 뮤지컬이 영화와 확실하게 결을 달리하는 지점은 두 자매의 서사다. 영화의 큰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무대는 인물들의 내면을 훨씬 깊게 들여다본다. 러닝타임이 늘어난 만큼 엘사와 안나의 감정선은 한층 입체적으로 다듬어졌다.
ⓒ에스앤코
무대 위의 엘사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여왕이기 전에, 자신의 마법이 남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킨 여린 존재다. 안나 역시 마냥 밝기만 한 동생이 아니다. 어린 시절 닫혀버린 방문 앞에서 홀로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결핍이 도드라지면서, 그가 왜 언니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눈보라 속으로 뛰어드는지 설득력을 얻는다.
새롭게 추가된 12곡의 넘버는 이 자매의 마음에 묵직한 무게를 싣는다. 2막에서 엘사가 자신이 괴물인지 자문하며 두려움에 맞서는 ‘몬스터’(Monster)나, 두 자매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애틋함을 감추지 못하는 듀엣곡 ‘아이 캔트 루즈 유’(I Can't Lose You)는 영화에서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던 감정의 파고를 끌어올린다.
2막 후반, 엘사가 화려한 드레스 대신 바지 수트를 입고 무대를 달리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수동적인 공주의 틀을 깨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체적인 인물로의 성장이 시각적으로 또렷하게 드러난다. 결국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는 것은 왕자의 입맞춤이 아니라, 상처를 마주한 언니의 용기와 곁을 지킨 동생의 굳건한 연대다.
ⓒ에스앤코
물론 3D 그래픽으로 구현됐던 원작의 거대한 눈보라나 얼음 궁전의 스케일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조명과 영상 위주로 펼쳐지는 무대 연출이 다소 정적으로 느껴질 여지는 있다. 추가된 노래들로 인해 극의 속도감이 간혹 느슨해지는 구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라이브 연주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배우들의 호흡을 마주하는 경험은 스크린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동을 안긴다. 정선아·정유지·민경아(엘사 역)의 시원한 가창력과 박진주·홍금비·최지혜(안나 역)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여기에 능청스럽고 순수한 연기로 객석에 웃음을 안기는 정원영·한규정·이창호(올라프 역), 묵묵하고 든든한 매력으로 여정을 함께하는 차윤해·신재범(크리스토프 역), 반전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김원빈·황건하(한스 역)의 탄탄한 호흡이 어우러지며 무대를 빈틈없이 채운다.
뮤지컬 ‘겨울왕국’은 화려한 눈요깃거리에만 머물지 않고, 두 소녀가 서로를 통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아이들에게는 눈앞에서 마법이 펼쳐지는 꿈의 공간으로, 어른들에게는 지나온 결핍과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무대로 손색이 없다. 공연은 샤롯데씨어터에서 내년 3월 1일까지 이어진다. 이후엔 부산 드림씨어터로 무대를 옮겨 여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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