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추위의 ‘조정 기능’ 사라진 미디어 거버넌스
부처별 정책 속 유료방송 위기 대응은 뒷전
방송미디어통신위원가 8월 20일 서울에서 유료방송사업자 및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유료방송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기반 마련을 위한 '유료방송 활성화 민관협의체' 첫 회의를 개최했다.ⓒ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가 새로운 이름과 진용을 갖추고 움직인지 1년이 다 돼갑니다. 밀려 있던 지상파와 유료방송 재허가 문제를 풀고, 개정 방송3법의 후속 제도 정비에도 손을 대는 등 무언가 하고 있긴 합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방미통위는 출범하면서 과기정통부가 맡아온 인터넷·케이블TV 인허가와 유료방송, 뉴미디어·디지털방송 정책까지 넘겨받았습니다. 이 진흥 정책과 맞물린 제도 손질 속도가 위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업계가 진단하는 국내 미디어 거버넌스는 '각자도생'과 '파편화'로 요약됩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모두의 AI' 등 AI 산업 키우기에 올인 중이고, 문화체육관광부는 K-콘텐츠 진흥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미통위는 업무 분야 확장에 아직도 적응을 못하는 것인지, 기존의 방송·통신 현안에만 집중하고 당장 시급한 유료방송 진흥은 뒷전이라는 불만이 나옵니다.
아예 손을 놓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8월 민관협의체라는 걸 만들어 유료방송 시장을 어렵게 하는 요금·약관 규제 개선, 사업자 간 콘텐츠 사용료 협상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속도가 더디다 보니 성의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료방송 산업 활성화는 항상 다른 아젠다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가장 팽팽하게 대치 중인방송채널사용사업자(PP)와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간 콘텐츠 대가 산정을 두고 정부는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방미통위는 '시장 자율 협상이 원칙'이라며 직접 개입을 꺼리면서도 '중소 PP는 보호해야 한다'며 과감한 규제 완화나 시장 재편에는 선을 긋고 있습니다. 시장 자율을 완전히 허락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부 개입 기준도 선명하지 않으니 당사자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정체 상태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장은 OTT라는 뉴미디어가 장악했고 케이블과 IPTV는 레거시 미디어로 처지가 바뀌며 힘겨운 생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IPTV와 위성방송은 통신사를 모회사로 두고 그룹 차원에서 힘을 실어줄 여지가 있지만, 독립 SO가 대다수인 유료방송은 재무·투자 여력을 보완해 줄 '뒷배' 없이 혈혈단신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업계는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융추위)' 시절을 떠올립니다. 20년이나 지난 얘기를 왜 꺼내냐고요? 그 시절의 융추위는 최소한 지금처럼 어정쩡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2006년 국무총리 소속 자문·조정 기구로 출범한 융추위는 방송과 통신 경계가 무너지던 시기 부처 간 갈등을 조율하고 IPTV 도입 및 통합 규제체계 밑그림을 짰습니다.
초고속인터넷망을 기반으로 방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IPTV가 등장하면서 이를 두고 옛 정보통신부는 '제3의 새로운 서비스'에 가깝다고 봤고, 옛 방송위원회는 방송으로 봤습니다. 누가 허가하고 어떤 규제를 적용할지를 놓고 부처와 업계 이해가 충돌하자 총리실이 중간에서 교통 정리를 하기 위해 융추위를 띄운 겁니다.
여러 부처와 이해관계자가 얽힌 사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조정하고, IPTV 정책방안을 구체화해 법제화와 새로운 규제체계 마련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케이블TV 업계가 그리워하는 것은 융추위라는 조직 자체가 아니라, 부처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산업의 방향을 정해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컨트롤타워의 그립력'입니다.
현재 미디어 산업 전체를 놓고 부처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정책을 끌고 갈 컨트롤타워는 실종됐습니다. 각 부처가 각자의 영역에서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이해관계가 겹치는 일마다 중구난방이 됩니다. 업계는 산업 전체의 방향을 잡고 이해관계를 조정할 구심점이 현재의 방미통위 체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일부 현안에 대해서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디어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향후 5년의 중장기 로드맵입니다. 손댈 것은 손대고 풀 것은 과감히 풀어 가뜩이나 시장 쇠퇴로 신음하는 사업자들이 자율적으로 생존 방안을 찾아낼 수 있도록 과감한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AI도 공급자와 수요자가 함께 생태계를 이뤄야 성장할 수 있듯, 유료방송 역시 플랫폼의 공급 기반이 무너지면 콘텐츠와 지역 미디어 생태계도 모조리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레거시 미디어를 포함한 미디어 정책을 조정할 범정부 컨트롤타워 구축과 실행 가능한 산업 로드맵 마련이 시급합니다. 유료방송이 회생 불가능한 상황에 몰린 뒤에야 수술대에 올리는 미련한 짓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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