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신하는 기억·판단…‘디스킬링’ 우려
AI 활용 이후 인지·전문 수행능력 변화 관찰
“AI 의존보다 스스로 사고·검증하는 과정 중요”
인공지능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부모님 전화번호가 몇 번이더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전화번호와 생일 몇 개쯤은 자연스럽게 외우고 다녔다. 그 좋던 기억력은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무뎌졌다. 이제 인공지능(AI) 시대다. 기억을 넘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까지 AI에게 맡기는 게 일상화된다면 어떤 능력이 퇴화될 것인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일일이 찾아보기보다 AI에 묻고, 긴 글은 요약을 맡긴다. 글을 쓰거나 여러 정보를 비교해 판단할 때도 AI의 도움을 받는다. 원하는 답을 몇 초 만에 얻을 만큼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스스로 정보를 찾고 답을 만들어가는 일은 줄어들고 있다.
AI에 맡긴 ‘생각’…편리함 뒤 쌓이는 ‘인지 부채’
4일 의료계에 따르면 AI 활용이 일상화되면서 ‘디스킬링(deskilling·탈숙련)’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AI에 맡기는 일이 많아질수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기회가 줄고,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그동안 쌓아온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AI 사용이 사람의 사고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 연구에서도 변화가 관찰됐다. MIT 미디어랩이 지난해 참가자 54명을 대상으로 에세이 작성 실험을 진행한 결과, 챗GPT 활용 집단은 신경 활성도와 언어 다양성, 에세이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결과를 보였고 자신이 쓴 글을 정확히 인용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AI의 도움으로 글을 쓰는 부담은 줄일 수 있지만, 그만큼 스스로 고민하고 내용을 구성하는 과정도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이처럼 당장의 편리함을 얻는 대신 스스로 사고하는 과정이 줄면서 생길 수 있는 부담을 ‘인지 부채(cognitive debt)’라고 표현했다.
국내 의료진도 AI 사용이 주는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다. 노경진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AI가 업무 효율을 높여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생각하고 글을 구성하는 과정까지 맡기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며 “특히 학습의 기초를 형성하는 시기에는 지나친 의존을 피하고, 먼저 스스로 생각한 뒤 AI가 제시한 내용도 충분히 이해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글쓰기나 학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전문적인 판단이 필요한 의료 현장에서도 AI 의존에 따른 ‘디스킬링’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제학술지 ‘랜싯 위장병학·간장학(The Lancet Gastroenterology & Hepatolog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AI 보조 대장내시경 도구를 3개월간 사용한 의사 19명이 이후 AI 없이 검사를 했을 때 용종 발견율은 AI 도입 전 평균 28.4%에서 22.4%로 낮아졌다. 참여한 의사들은 모두 2000건 이상의 내시경 경험을 가진 숙련된 의료진이었다.
AI의 도움을 받아 성과를 높이는 것과 AI 없이도 기존 실력을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의미다. AI가 일부 업무를 반복적으로 대신하면 직접 판단하고 경험할 기회가 줄면서 기존에 쌓은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해당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은 “AI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일부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며 “탈숙련화를 막기 위한 해결책은 향후 10년 동안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AI 시대, ‘생각하는 힘’ 지켜야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AI에 익숙해질수록 판단 자체를 지나치게 신뢰할 가능성도 있다. 이른바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이다. AI가 잘못된 답을 내놓더라도 이를 의심하거나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AI에 처음부터 답을 맡기기보다 스스로 생각한 뒤 놓친 부분을 보완하거나 내용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러한 원칙은 정서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AI를 고민이나 감정을 털어놓는 창구로 활용할 수는 있지만, 위로나 상담까지 지나치게 의존해 실제 사람과의 관계를 대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준희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AI가 기억력이나 사고력을 떨어뜨린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AI가 정리한 내용을 스스로 생각하는 노력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보를 분석하고 비교·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처음부터 AI에 맡기기보다 먼저 혼자 생각하고 초안을 잡은 뒤 놓친 관점이나 반대 근거를 묻고, 중요한 내용은 직접 확인하는 습관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AI의 공감과 위로에만 의존하면 일시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지만 실제 사람과의 교류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며 “AI의 건강한 사용을 위해서는 나의 생각을 ‘대신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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