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싱가포르 브랜드가 내건 ‘1910’…롯데 청담 매장 논란에 공정위 조사까지
"전통 빙자한 위생·불친절은 도태"
아카이브 복원만으론 부족…과거 유산, 현대 소비자 언어로 번역해야
원형에 대한 수요가 커지자 기업들도 앞다퉈 자사의 유산을 꺼내 들고 있다. 옛 로고를 복원하고, 최초의 제품을 오늘의 기술로 다시 해석하는 ‘헤리티지 마케팅’이다. 그러나 오래된 역사를 내세운다고 해서 모든 브랜드가 시장의 신뢰를 얻는 건 아니다. 유산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신뢰의 자산이 되기도, 혹은 역풍을 부르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현대자동차는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2인승 콘셉트카 ‘포니 쿠페’를 반세기 만에 다시 불러냈다. 양산되지 못한 채 도면으로만 남아 유실됐던 차량을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현대차는 2022년 7월 포니 쿠페에서 영감을 얻은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콘셉트카 ‘N 비전 74’를 먼저 공개한 데 이어, 원작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손잡고 포니 쿠페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 냈다. 이 복원 모델은 2023년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첫 헤리티지 행사 ‘현대 리유니온’에서 공개됐고,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전시 ‘포니의 시간’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당시 “창립 50년을 앞두고 내부적으로 과거를 정리하고 알면서 다시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과거를 미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유 모델을 만들려 했던 기업의 출발점을 오늘의 기술 방향과 연결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헤리티지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포니 쿠페에서 영감을 얻은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콘셉트카 N 비전 74 ⓒ현대자동차
반면 유구한 역사 자체가 곧바로 시장의 호응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휠라(FILA)의 역사는 1911년 필라 형제가 비엘라 인근 코졸라에서 세운 섬유 회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휠라코리아가 글로벌 브랜드를 인수하며 한국 기업 소유가 된 이후, 휠라는 100년이 넘는 이 역사를 리뉴얼의 주요 자산으로 삼았다. 지난해 4월 브랜드 헤리티지를 담은 콘셉트 스토어 ‘FILA 1911 명동점’을 여는 등의 시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긴 역사는 실적 반등으로 직결되지 못했다. 지주사 휠라홀딩스는 사명을 미스토홀딩스로 변경하는 등 체질 개선에 나섰지만, 패션 본업의 반등보다 골프 자회사 아쿠쉬네트의 실적이 전체를 견인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헤리티지라는 출발 자산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오늘날의 소비자 요구에 맞게 조율해 내지 못하면 시장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역사가 자산으로 취급되면서 실체 없는 역사를 부풀리거나 빌려오는 ‘헤리티지 워싱’ 논란도 불거졌다. 대표적인 논란이 싱가포르 커피 브랜드 바샤커피다. 바샤커피는 차 브랜드 TWG를 만든 기업가 타하 부크딥이 2019년 선보인 신생 브랜드지만, 로고와 패키지에 ‘1910’과 모로코 마라케시를 새겨왔다. 1910년은 브랜드가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마라케시 궁전 ‘다르 엘 바샤’와 그 커피룸에서 따온 숫자다.
바샤커피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1층 커피 부티크 ⓒ롯데백화점
롯데백화점이 2024년 8월 서울 청담동에 국내 첫 매장을 열자 소비자 오인 논란이 불거졌고, 공정거래위원회는 같은 해 9월 23일 롯데쇼핑 본사에 조사관을 보내 표시광고법 위반 여부를 조사했다. 롯데백화점 측은 “마라케시 궁전의 커피룸을 본떠 만든 브랜드인 만큼 허위 광고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브랜드 설립 시점과 연도 표기 사이의 괴리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평소 바샤커피를 즐긴다는 박모(27) 씨는 “패키지에 ‘1910’이라고 큼직하게 적혀 있어서 당연히 100년 넘은 모로코 전통 커피 브랜드인 줄 알았다”며 “알고 보니 몇 년 안 된 브랜드가 콘셉트만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듣고 나니 비싼 돈을 주고 ‘분위기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씁쓸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논란은 오리지널을 찾는 청년들의 심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보 과잉 시대의 소비자는 검증 실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웃돈을 주며 ‘시간의 무게’를 선택한다. 이런 소비자에게 기업의 연도 조작과 과장된 스토리는 단순한 마케팅 기술이 아니라 신뢰에 대한 기만으로 받아들여진다. 검색 몇 번으로 진위를 가려내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빌려온 역사’는 ‘없는 역사’보다 더 치명적인 독이 되는 셈이다.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이 무조건적인 면죄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본질’과 시대에 맞춰 개선해야 할 ‘운영 방식’을 구분하지 못한 채, 비위생적인 환경이나 불친절한 서비스까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집하는 순간 원형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 도태되어야 할 낡은 관행으로 전락한다.
명동 하동관의 놋그릇 ⓒ하동관
종로구의 한 유명 노포를 자주 찾는다는 직장인 강모(35) 씨는 “오래된 맛을 찾아가더라도 끈적거리는 식탁이나 불친절한 태도까지 감수하고 싶지는 않다”며 “음식의 원형은 지키되, 매장 청결이나 결제·예약 방식 등은 요즘 기준에 맞춰 개선하는 곳을 더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례는 원형의 보존과 현대적 접근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가사유상의 형태와 공간의 깊이는 훼손 없이 유지하되, 감상 공간을 새로 설계해 몰입도를 높였다. 유물을 재해석한 문화상품 역시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해 일상용품의 형태로 전달했다. 하동관이 주소를 옮기면서도 놋그릇을 지킨 것 역시 형식은 바꾸되 본질은 남긴 선택이다.
시간의 검증을 거친 고유한 철학을 품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오늘의 언어로 대중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흉내 낸 유행이 빠르게 소멸하는 시대, 검증된 오리지널로 살아남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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