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김소현, 2023년 손지수 이어 올해도 성악가 크리스틴 기용
스타 의존도 높은 대작 뮤지컬 시장, 인지도 대신 '배역 적합성' 증명
올해 12월 개막하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40주년 스페셜 시즌의 크리스틴 다에 역에 소프라노 이해원과 최선호가 캐스팅됐다. 국내외 오페라 무대를 오가며 활동해 온 이해원과, 독일 쾰른 국립음대 석사 과정을 마친 최선호 모두 이번이 첫 뮤지컬 무대다. 글로벌 개막 40주년이자 한국 초연 25주년을 맞이한 기념비적인 시즌의 여주인공 자리를 뮤지컬 경험이 전혀 없는 배우들에게 맡긴 셈이다.
이에 앞서서도 2001년 한국 초연 당시 제작진은 이혜경과 함께, 뮤지컬을 단 한 편도 본 적 없던 서울대 성악과 대학원생 김소현을 크리스틴으로 세웠다. 13년 만의 한국어 공연이었던 2023년에도 크리스틴은 소프라노 손지수와 팝페라 가수 송은혜였다. 손지수에게는 첫 뮤지컬 주연이었고, 송은혜는 이 작품으로 한국뮤지컬어워즈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오페라의 유령' 40주년 스페셜 시즌에서 크리스틴 역을 맡은 이해원, 최선호 ⓒ에스앤코
이처럼 꾸준히 신예를 기용하는 건, 크리스틴이라는 배역이 가진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무명의 코러스 단원에서 하룻밤 새 프리마돈나로 떠오르는 극 중 서사는, 처음 대극장 주연을 맡은 신인 배우의 긴장감 및 성장 과정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배우의 낯선 얼굴이 오히려 관객을 선입견 없이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까다로운 음악적 조건도 한몫한다. 크리스틴은 초고음을 소화하고, 극 내내 클래식 발성을 유지해야 한다. 팝과 벨팅 창법이 주류인 뮤지컬 시장보다 성악계에서 적임자를 찾기 쉬운 이유다. 한국 초연부터 모든 시즌에 참여해 온 라이너 프리드 협력 연출이 이번 캐스팅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목소리’를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캐스팅 공식은 비단 ‘오페라의 유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같은 원작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뮤지컬 ‘팬텀’도 2015년 한국 초연에서 크리스틴에 소프라노 임선혜와 김순영을 캐스팅했다. 유럽 고음악계에서 활동하던 임선혜의 뮤지컬 데뷔는 연출가가 2년간 공들인 끝에 성사됐다. 눈여겨볼 대목은 상대역이다. ‘팬텀’의 팬텀은 류정한·박효신·카이였고, ‘오페라의 유령’의 유령은 2023년 조승우, 올해는 최재림·전동석·박강현이다. 티켓 파워가 검증된 스타가 중심을 잡고, 여주인공 자리를 통해 새로운 얼굴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일종의 분업 구조를 취한다. 즉 주연급 신인 발탁은 무모한 모험이라기보다 계산된 위험 분산에 가깝다.
무대에 오를 새로운 얼굴이 반드시 경력이 전무한 완전한 신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13년 ‘위키드’ 한국 초연은 옥주현·정선아라는 톱스타와 함께 박혜나·김보경을 주역으로 기용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대학로에서 10여 년간 활동해 온 박혜나에게도 대극장 주연은 처음이었다. 이후 박혜나는 국내에서 엘파바를 가장 많이 연기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말하는 신인의 범주가, 단순히 경력이 없는 배우를 넘어 대극장의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한 숨은 실력자들까지 아우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페라의 유령' 2009년 공연 사진. 초연에 이어 2009년에 크리스틴으로 합류한 김소현 ⓒ에스앤코
이런 사례가 주목받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제작비와 티켓 가격이 함께 오르면서 제작사들은 흥행 실패를 피하려 소수의 스타에게 의존하는 안전한 길을 택하고 있다. 한 배역에 여러 배우를 세우는 멀티캐스팅이 일반화되면서, 인기 배우가 여러 작품에 동시에 출연하는 ‘겹치기 출연’도 관행이 됐다. 결국 무대는 늘 익숙한 얼굴로 채워지고, 실력 있는 새로운 배우가 주연으로 도약할 기회는 갈수록 좁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물론 훌륭한 신인을 발굴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초연 크리스틴이었던 김소현 역시 과거 인터뷰에서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다시 오페라 무대로 돌아갔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한 작품이 연 문이 시장 전체의 주연 풀 확장으로 이어지려면, 발굴된 인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다음 작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크리스틴처럼 특수한 음악 조건 덕분에 발탁된 배우들이 향후 다른 작품에서도 주연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업계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그럼에도 ‘오페라의 유령’과 ‘팬텀’ ‘위키드’ 등의 사례가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탄탄한 작품성과 검증된 상대역이라는 안전장치가 뒷받침된다면, 인지도보다 배역 적합성을 최우선으로 둔 과감한 캐스팅이 얼마든지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0주년 무대에 오를 두 명의 신예 크리스틴이 그 공식을 다시 증명할 수 있을지, 나아가 그 뒤를 이어줄 다음 무대가 한국 뮤지컬 생태계에 제대로 마련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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