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대신 ‘몸’으로 서사 이끈다…잇따른 무대 위 신체극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9.30 06:00  수정 2026.09.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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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덜어내고 몸짓·음악으로 채운 웰메이드 신체극들

'네이처 오브 포겟팅' 삼연 개막, '슬립노모어' 10만 돌파 등 피지컬 시어터 강세

숏폼·자막 등 텍스트 과잉 시대 반작용… 설명 덜어낸 무대에 관객 호응

대사 대신 배우의 신체 움직임을 전면에 내세워 서사를 이끄는 신체극(피지컬 시어터)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상황을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움직임과 음악, 무대 이미지로 서사를 전달하는 작품들이다. 영국 작품의 라이선스 공연부터 관객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보는 이머시브 공연, 국내 창작극, 무용과 연극의 경계에 선 작품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이들 작품은 설명을 덜어낸 자리를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지난 18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세 번째 시즌을 개막했다. 영국 극단 시어터 리의 작품을 한국 배우들이 공연하는 라이선스 프로덕션으로, 원작 연출가 기욤 피제가 매 시즌 내한해 연습을 이끈다.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사진 ⓒ(주)연극열전

작품은 조기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50대 남성 톰을 주인공으로 한다. 대사와 노래 없이 배우들의 움직임과 라이브 연주만으로 톰의 흩어지는 기억과 우정, 사랑, 이별을 그린다. 네 명의 배우가 하나의 흐름처럼 움직이는 앙상블이 극의 뼈대이고, 대본이 비운 자리는 실시간 연주가 채운다. 2017년 영국에서 초연된 이후 국내에서는 2019년 우란문화재단 초청공연으로 처음 소개됐다. 이후 2022년 라이선스 초연, 2023년 재연을 거쳤다. 이번 시즌은 박정원, 전성우, 백성현이 톰 역을 맡아 11월 29일까지 공연한다.


장기 흥행 중인 대형 작품도 있다. 서울 충무로의 옛 대한극장을 7층 규모의 ‘매키탄 호텔’로 개조해 선보이는 ‘슬립노모어 서울’이다. 영국 제작사 펀치드렁크의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1930년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옮겼다. 인물 간의 갈등, 탐욕, 파멸 등의 서사를 안무가 맥신 도일이 연출한 배우들의 움직임으로만 전달한다. 관객은 가면을 쓰고 호텔 안을 자유롭게 오가며 원하는 배우의 동선을 쫓는다. 지난해 7월 프리뷰로 문을 연 뒤 1년간 약 1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머시브극 '슬립노모어' 공연 사진 ⓒ미쓰잭슨

국내 창작극도 신체극의 문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극단 물결의 ‘의자 고치는 여인’은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서울 광진구 나루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기 드 모파상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남자를 55년 동안 사랑한 여인의 삶을 그린다. 무대에는 버려진 의자들이 가득하고, 배우들은 의자를 고치는 동작을 군무로 풀어 인물의 삶과 상처를 드러낸다. 극을 안내하는 해설자가 등장하지만, 실질적 극의 중심은 대사가 아닌 배우들의 몸과 무대 이미지다. 2020년 아크로예술극장에서 초연한 뒤 여러 도시를 돌며 다듬어 온 레퍼토리로, 송현옥 세종대 교수 겸 극단 물결 예술감독이 연출했다.


무용과 연극의 경계에 선 작품도 있다. 지난 6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국내 초연한 캐나다 무용단 키드 피봇의 ‘어셈블리 홀’이다. 안무가 크리스털 파이트가 안무를 맡아 2023년 영국 올리비에상 최우수 무용작품상을 받았다. 중세 시대를 재연하는 동호회 모임을 통해 공동체의 붕괴와 결속을 다룬다. 장르는 무용이지만 무용수들이 미리 녹음된 대사에 맞춰 입을 움직이고 몸을 쓰는 ‘립싱크’ 기법이 핵심이다. 대사의 억양과 호흡, 망설임까지 몸으로 옮겨, 말이 정보인 동시에 움직임의 리듬이 된다.


송현옥 연출작 '의자 고치는 여인' 공연 사진 ⓒ극단 물결

일각에선 정보가 과잉 공급되는 미디어 환경이 신체극에 대한 관객의 수요를 높였다고 분석한다. 한 공연 관계자는 “숏폼 영상과 자막 등 모든 상황을 텍스트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대중문화에 피로감을 느낀 관객들이 오히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무대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며 “설명적인 언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서사를 일방적으로 주입받기 보다,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여백을 채울 수 있는 무대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언어의 장벽이 낮다는 점도 강점이다. 대사가 적을수록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깎일 여지도 줄어든다. 영국 작품인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고, 캐나다 무용단의 작품이 국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이 관계자는 “몸의 언어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직관적으로 건드린다”며 “번역이라는 문턱이 없기 때문에 전 세계 관객에게 진심을 가장 훼손 없이 전달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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