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도, 골목도, 벽보 하나도 무대로”…아비뇽 축제로 본 韓 연극 시장의 가능성

데일리안 (프랑스, 아비뇽)=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7.25 15:30  수정 2026.07.25 18:31

40도 폭염 뚫은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 열기

민관 분담과 완전한 개방성이 만든 ‘공연예술 수도’

전용 극장의 틀을 깨는 생태계의 유연함

7월의 아비뇽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거리를 메운 ‘소리’와 ‘색’이다. 좁은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이름 모를 극단의 악기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눈을 돌리는 곳마다 사람 키를 훌쩍 넘어선 포스터 벽이 시야를 가린다. 전단 뭉치를 손에 쥔 배우들이 지나가는 관객의 눈을 맞춰오고, 길 한복판에서 멈춰 선 이들이 즉석에서 소규모 극을 벌인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도시는 연극의 열기로 가득하다.


오프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는 공연 포스터들 ⓒ데일리안 박정선 기자

흔히 ‘아비뇽 연극제’로 불리는 공식 축제 ‘아비뇽 페스티벌(IN)’은 1947년 연출가 장 빌라르가 창설해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특히 올해는 영어·스페인어·아랍어에 이어 아시아 언어로는 최초로 한국어를 공식 초청 언어로 선정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부터 구자하의 연작, 이자람의 판소리 등 총 9편의 한국 작품이 주요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현장에서 체감한 아비뇽의 진짜 동력은 공식 페스티벌(IN)과 동시에 열리는 ‘오프(OFF) 페스티벌’이었다. 1966년 시작해 올해 60주년을 맞은 오프는 중앙의 예술감독도, 사전 심사도 없다. 참가 극단이 직접 공간을 확보하고 제작비와 홍보를 책임지는 구조다. 올해 오프에서는 139개 공연장에서 1731편의 작품이 올려졌고, 하루 평균 1250회라는 엄청난 규모의 무대가 도시 전역에서 매시간 터져 나왔다. 관객들은 포스터와 전단을 보고 직관적으로 공연장 문을 열고 들어가고, 거리는 신진 아티스트와 세계 각국의 프로듀서가 직접 만나 신작을 거래하는 거대한 공연예술 마켓으로 기능한다.


현장에서 만난 창작자들의 목소리는 이 공간이 가진 열기를 그대로 증명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며 올해 아비뇽 OFF 페스티벌 무대에 참가한 청년 고영준 씨는 서울과 파리를 배경으로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로맨스를 담은 ‘노 데이팅’(NO DATING)을 통해 솔직함과 위트로 현지 관객들의 호평을 끌어냈다.


아비뇽 OFF 페스티벌 무대에 올려진 '노 데이팅' 포스터와 출연자 고영준씨 ⓒ데일리안 박정선 기자

한국 전통의상인 푸른빛의 두루마기를 걸친 채 전단을 돌리고 있던 고영준 씨는 “무대 크기나 지원 규모와 상관없이, 관객과 일대일로 직접 눈을 맞추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OFF 무대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길거리에서 전단을 돌릴 때는 과연 사람들이 올까 싶었지만, 작고 소박한 공간이라도 진심을 담아 연기하면 언어와 국적을 넘어 관객들이 함께 웃고 울어주는 걸 피부로 느낀다. 창작자에게 아비뇽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연극인들의 관점을 시험받고 성장하는 장”이라고 말했다.


오프 공연을 찾은 한 프랑스 국적의 연극 연출가는 “하루에도 수백 편의 공연이 쏟아지는 이 골목에서 우리 같은 신진 창작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뿐”이라며 “폭염 속에서 전단을 돌리고 길 위에서 짧은 연기를 보여주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이미 관객과 만나는 연극의 시작”이라고 했다.


아비뇽 축제는 한국 연극 시장이 한 단계 더 확장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지점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공간을 바라보는 유연한 시선이다. 1947년 연출가 장 빌라르가 버려진 교황청 성벽을 무대 삼은 IN 공연은 물론, 창고와 교실, 주차장, 카페까지 무대로 바꿔버리는 OFF의 유연함은 전용 극장이라는 틀에 갇힌 우리 연극계에 큰 힌트가 된다.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선 관객들 ⓒ데일리안 박정선 기자

한국 연극계는 세계적인 기술적·미학적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전용 극장 중심의 운영에 크게 의존한다. 대학로 역시 주변 상권이 발달해 있지만, 공연 관람 이후 소비로 이어지는 단선적 구조에 그친다. 고택이나 도심 골목, 일반 상업 공간 등 기존 자원을 연극적 공간으로 재해석하는 연출적 전환이 이뤄진다면 무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축제를 받아들이는 지역 공동체와 상권의 깊은 참여 방식도 인상적이다. 아비뇽 축제 기간 동안 현지 상인과 주민들은 단순한 외지인 맞이용 상권을 넘어선다. 주민들은 공간을 내어주며 소극장을 만들고, 상인들은 거점과 분위기를 제공하며 축제의 집행을 떠받친다. 거리를 가득 메운 아날로그식 홍보 행렬과 거리 퍼포먼스 역시 도시 전체의 협조와 참여가 있기에 가능하다. 한국 연극 시장도 주민과 상권이 단순 관람객을 넘어 기획과 실행의 파트너로 결합할 때, 일회성 행사를 벗어나 지속가능한 동력을 얻게 된다.


아비뇽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예술 행위들 ⓒ데일리안 박정선 기자

이 모든 생태계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에는 공공과 민간의 명확한 역할 분담과 완전한 개방성이 자리한다. 아비뇽은 예술감독이 기획하고 공공 재정이 투입되는 ‘IN’과, 민간협회(AF&C)가 자율적으로 판을 모으는 ‘OFF’로 이원화되어 있다. 아비뇽 시 등 공공은 안전과 인허가, 도시 인프라 지원이라는 바탕을 단단히 깔아주고, 작품 선정과 무대 운영은 예술감독과 민간 창작자에게 완전히 맡긴다. 특히 심사도 초청도 없는 OFF의 개방성은 정통 연극부터 실험극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수용하며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도록 한다.


아비뇽의 밤하늘과 거리를 메운 벽보 행렬, 그리고 청년 연극인들의 땀방울이 보여준 것은 거대한 예산의 힘이 아닌, 자원을 달리 보는 관점의 깊이와 생태계의 유연함이었다. 한국 연극의 경쟁력은 이미 검증됐다. 중요한 것은 이를 담아낼 판을 어떻게 짜느냐다. 거대 자본을 들여 시설을 새로 짓지 않더라도, 기존 공간의 재해석, 시민과의 유기적 결합, 공공과 민간의 명확한 역할 분담이 이뤄진다면 한국의 골목과 거리는 언제든 세계적인 무대로 확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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