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 역사㊹] 이통의 난 – 왕이 떠나고 노예가 봉기하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9.08 14:00  수정 2026.09.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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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년인 서기 1232년 7월의 개경은 혼란 그 자체였다. 전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을 피해 임금이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떠났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피난이 아니라 아예 강화도에 궁궐을 짓고 눌러 앉는 천도에 가까웠다. 임금이 떠나면 관리들과 호위군도 따라야 하고, 몽골의 침입이 다시 있을게 확실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도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일시에 수 만명이 움직이게 되면서 큰 혼란과 고통이 생겼다는 것이다.


강화도로 천도하는 것은 사실, 고종의 뜻이라기 보다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뜻이 더 강했다. 문제는 제대로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기다 장마철이라 비가 심하게 내리면서 길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급하게 피난을 떠나기로 한 개경 주민들 상당수가 비와 진흙 수렁이 된 길에서 오가지 못하고 큰 고통을 겪었다. 이렇게 개경이 비워지자 불온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어사대의 조례인 이통이었다.


강화 전잰기념관이 있는 대몽항쟁 그림ⓒ저자 촬영

어사대의 조례 이통(李通)이 경기의 초적과 성안의 노예들을 불러 모아 반역하고 유수와 병마사를 쫓아내었다. 마침내 삼군을 만들고 여러 사찰에 첩문을 보내어 승도를 불러 모았으며, 공·사의 전곡을 약탈하였다.


어사대는 고려의 감찰기관으로 관리들이 잘못을 저지르는지 감시하는 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사헌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우리가 잘 아는 암행어사의 어사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이런 어사대 소속이라고 하니까 뭔가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조례는 관아에서 부리는 하인으로 관노비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뭔가 신분을 뛰어넘는 카리스마와 능력이 있었는데 개경이 텅 비어버린 틈을 이용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개경 인근 지역의 초적들은 물론 개경에 남은 노비들을 규합해서 관리들을 내쫓고 개경을 점령해 버린 것이다. 몽골군이 오기 전에 이미 노비들이 차지한 개경의 풍경은 어땠을까? 남은 사람들은 아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거기다 이통은 개경 주변의 사찰에 공문을 보내서 승려들을 불러 모았고, 관청에 보관 중인 곡식을 약탈했다. 아마 약탈한 곡식으로 승려들과 도적들을 배불리 먹이고 같은 편으로 포섭했을 것이다. 글자 그대로 왕이 떠나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강화도에 도착해서 소식을 들은 최우는 싸워야 하는 몽골군과는 소극적이었던 반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을 진압하는데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충주 관노의 난을 진압했던 반란 진압 전문가 이자성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진압군을 맡겨서 육지로 보낸다. 개경을 장악한 이통의 반란군은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승천부로 향했다. 오늘날 황해도 개풍군인 이곳은 고종이 강화도로 떠날 때 거쳐간 곳이다. 임금이 적을 피해 도망친 곳으로 자국민의 반란을 진압할 군대가 돌아온 것이다. 상륙하려는 진압군과 막는 반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잘 무장되고 훈련받은 진압군이 승리한다. 크게 패한 반란군은 개경으로 정신없이 도망친다. 궁궐을 지키고 왕을 호위하는 견룡행수 이보와 정복수가 야별초를 이끌고 먼저 개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페이크를 시전했다.


이보가 속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관군을 격파하고 돌아오는 것이니 속히 문을 열라.”라고 하였다. 문지기가 그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 이보와 정복수 등이 문을 지키던 자를 베고, 군사를 이끌어 이통의 집에 이르러 그를 베었다.

예전 최충헌이 집권한 시절에 개경 근처의 사찰 승려들이 비슷한 방식을 써서 성문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설픈 반란군들이라서 그런지 속이는 데 성공했다. 성안으로 들어온 진압군은 곧장 이통의 집으로 가서 그의 목을 베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승천부에서 진압군을 막지 않고 집안에 머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진압군의 빠른 속도 때문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이자성이 이끄는 진압군의 본대가 도착하자 죽은 이통을 제외한 나머지 반란군 수뇌부는 도망쳤고, 나머지는 붙잡혀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통의 반란은 고려 조정과 최우가 잘 준비하고 대응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비록 전광석화처럼 진격해서 이통의 목을 베고 가담자들을 죽였다고 했지만 어제까지는 어사대의 하인으로 살았으며, 관청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들이나 개경 근처 사찰에서 머물던 승려들이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담하게 된 것은 고려 조정의 잘못된 판단과 서투른 일 처리 때문이었다. 다른 건 느리고 실수투성인데 반란 진압에만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고려군은 몽골군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과 더 많이 싸워야만 했다.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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