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부터 22일까지 아비뇽오페라극장서 '눈, 눈, 눈' 네 차례 공연
소리꾼 이자람에게 프랑스 아비뇽은 낯선 공간이 아니다. 이미 창작 판소리 ‘사천가’와 ‘이방인의 노래’ 등으로 아비뇽을 두 차례나 찾았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의 집행부가 직접 선택한 공식 초청 부문(In)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민간 사업 형태로 아비뇽의 자유 참가 부문(Off)을 두드렸을 때, 길거리에서 팀원들과 밥을 해 먹고 부채를 팔며 부러워했던 그 메인 무대다.
소리꾼 이자람의 '눈, 눈, 눈' 아비뇽페스티벌 공연 사진 ⓒ아비뇽페스티벌
올해로 80주년을 맞은 아비뇽 페스티벌이 한국어를 공식 초청 언어로 선정하면서 이자람의 ‘눈, 눈, 눈’은 당당히 메인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개막 전부터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Le Monde) 지면 전면에 무대 사진이 실리며 현지의 뜨거운 관심을 증명했다. 아비뇽 오페라극장에서 만난 이자람은 “르 몽드를 보고 가문의 영광이라며 신문 세 장을 챙겨뒀다”고 유쾌하게 웃으면서도, 자신이 갈고닦아 온 소리의 힘에 대해 단단한 확신을 드러냈다.
이번 아비뇽 초청 과정은 아티스트의 이름값이 아닌, 철저히 작품 자체의 완성도로 성사된 결과다. 초기 아비뇽 페스티벌 집행부는 ‘이자람’이라는 소리꾼을 알지 못했다.
“한국에 와서 나를 만나고는 ‘너 프랑스에 온 적이 있기는 하니?’라고 묻더라고요. 누군가로부터 ‘눈, 눈, 눈’을 추천 받고 작품성만으로 검토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누며 제가 과거 리옹이나 파리 등에서 공연했던 이력을 확인하고는 ‘너 도대체 누구냐’고 반응하더라고요. 공연 전부터 축제 측과 현지 언론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당시 작품을 확인한 이들의 신뢰 덕분인 것 같아요. 그 소문의 책임을 지려고 지금 기분 좋게 떨고 있습니다.”
프랑스 신문 1면에 실린 이자람 '눈, 눈, 눈'(왼쪽) ⓒ박정선 기자
이번 공연은 페스티벌의 상징인 교황청 야외무대 대신 실내 오페라극장에서 치러진다. 축제 측과 예술경영지원센터 모두 축제의 심장부인 교황청 무대를 강력히 추천했고 이자람 역시 욕심이 났으나, 최종적으로 무대 위 생존과 실리를 선택했다.
“솔직한 버전으로는 내가 살려고 여기를 골랐어요. 3000석 규모의 교황청 야외무대를 혼자 채우려면 온 힘을 쏟아야 하는데, 올해 아비뇽은 너무 덥더라고요. 2시간 동안 홀로 무대를 이끌며 그 더위와 싸우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어요. 이제 무작정 죽을 힘을 다하기보다 체력을 아껴야 할 나이거든요(웃음). 반면 이 오페라극장은 객석이 무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어 에너지가 한데 모여요. 소리꾼의 호흡을 집중시키기에 최적이고, 극장 자체가 참 예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주인과 하인’을 바탕으로 한 ‘눈, 눈, 눈’은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두 인물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을 파고든다. 이자람은 이 서사를 판소리로 각색하며 본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시각적 자료들을 총동원했다.
“대본을 쓰면서 영하 30도에 달했던 수년 전 몽골 겨울 여행의 기억을 끊임없이 꺼냈어요. 온통 눈밖에 없던 공간의 감각이죠. 또 하인 니키타가 눈밭을 구르는 극적인 장면은 사실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협곡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올해 아비뇽에서 한강 작가님의 낭독 공연이 함께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적인 연결감을 느꼈습니다.”
소리꾼 이자람의 '눈, 눈, 눈' 아비뇽페스티벌 공연 사진 ⓒ아비뇽페스티벌
한국어의 정교한 언어유희가 핵심인 판소리를 프랑스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자막의 밀도를 과감히 덜어낸 여백에 있었다. 번역가 한유미 부부와의 협업을 통해 자막의 양을 조절했다.
“불어는 주어부터 문장을 다 챙겨 써야 해서 그대로 옮기면 자막이 너무 길어져요. 제가 길게 말해도 자막은 짧게 처리해, 관객이 글을 읽는 대신 소리꾼의 연기와 눈빛을 보도록 유도했어요. 해외 관객들이 한국말을 모르지만, 제가 무대 위에서 ‘눈’을 상상하며 리듬과 목소리를 변주하면 그 호흡을 통해 상황을 직관적으로 감각하죠. ‘저 조그만 애가 어떻게 소리를 저렇게 하지’ 하면서 놀라시는 것 같아요.”
관객과의 호흡은 판소리의 핵심인 ‘추임새’를 통해 완성된다. 공연 초반 이자람이 직접 불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관객들에게 추임새를 설명하고 유도하는 시간은 관객과 편안하게 나누는 ‘첫 악수’와도 같다. 이자람 역시 이 때문에 추임해 설명에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너희들의 언어로 해도 된다’고 규칙을 열어주면, 극의 긴장감이 고조될 때마다 객석 곳곳에서 외국인 관객들이 주도적으로 ‘좋다’ ‘얼씨구’를 외쳐요. 감탄이 터지는 대목에서는 깊은 탄식이 극장을 채우기도 하고요. 관객이 무대를 함께 완성하는 건, 아비뇽에서도 똑같이 작동하는 셈이죠.”
20대 시절 ‘사천가’와 ‘억척가’를 들고 유럽을 찾았던 이자람은 늘 판소리의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판소리도 현대적인 조명과 수트 같은 세련된 의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 소리꾼도 깊은 문학적 소양을 지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자람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달라요. 그때는 끊임없이 날 무대에 세워 증명하려 했다면, 그 모든 과정이 이미 내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이제 고전 문학과 판소리를 어떻게 결합하느냐는 질문은 제게 의미가 없어요. 그냥 저를 통하면 자연스럽게 문학이 판소리가 되는 거니까요.”
마지막으로 이자람은 이번 공연을 보는 아비뇽의 관객들을 향해 확신에 찬 한 마디를 남겼다.
“운 좋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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