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에서 현실로…한강 작가 무대에 올린, 들리케 연출의 파격 [인터뷰]

데일리안 (프랑스, 아비뇽)=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7.21 15:47  수정 2026.07.21 15:47

아비뇽 교황청 무대에 오른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새’

“예술은 꼿꼿이 맞서는 저항… 원작과 배우 빛내는 조력자 될 것”

올가을 SPAF서 한국 초연…극장 환경 맞춰 무대 연출 재구성

거대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아비뇽 교황청 명예의 뜰, 폭염이 가시지 않은 늦은 밤 야외무대 위로 두 여성이 하얀 의상을 입고 마주 섰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의 베테랑 배우 이혜영이다. 이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각자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무대 뒤편 작은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아비뇽페스티벌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 공식 초청 부문(In)의 최대 화제작인 낭독 공연 ‘작별하지 않는다 – 새’의 한 장면이다. 이번 공연은 소설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제1장 ‘새’를 무대로 옮긴 작품으로, 역사적 비극인 제주 4·3 사건의 기억과 두 여성의 깊은 우정을 다룬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 날인 16일(현지시간), 아비뇽 현지에서 이번 작품을 총지휘한 프랑스 연출가 줄리 들리케는 “두 여성이 가진 인간적인 연약함과 잊혀진 역사의 기억을 무대 위에 올릴 수 있어 연출가로서 정말 영광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공연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인 티아고 로드리게스의 구상에서 출발했다. 올해 축제의 초청 언어로 한국어가 선정되고 한강 작가가 주요 손님으로 결정되면서, 감독은 들리케에게 소설의 단독 무대화를 제안했다. 이자벨 위페르와 이혜영이라는 파격적인 캐스팅 역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 등에서 협업한 두 배우의 호흡을 알아본 축제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제안을 받기 전까지 한강의 작품을 몰랐다는 들리케 감독은 소설을 읽자마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전막이 아닌 1장 ‘새’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책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다 읽을 수는 없었어요. 저는 두 여성 친구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파트를 골랐죠. 1장에는 두 사람의 과거 회상, 인선의 가출, 인선 어머니의 학살에 대한 기억 등 핵심적인 이야기가 모두 나옵니다. 관객들이 감각적인 여행으로 초대받는 느낌을 주고 싶었고, 이야기가 왜 여기서 끝날까 하는 호기심을 남겨 뒷부분을 더 읽고 싶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비뇽페스티벌
ⓒ아비뇽페스티벌

흥미로운 점은 이번 프로덕션이 원작자, 연출가, 두 주연 배우를 비롯해 자막과 조명, 통역 팀까지 모두 우연히 여성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들리케 감독은 이를 두고 “작품이 다루는 두 여성의 우정과 연약함을 팀원 모두가 온전히 공감할 수 있었던 아주 독특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무대는 온통 흰색으로 가득 차 있다. 하얀 배경 위에서 두 배우는 병원복이자 두 마리의 흰 앵무새를 연상시키는 하얀 의상을 입고 연기한다. 들리케 감독은 이 하얀색에 산 자와 죽은 자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영혼의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한강 작가의 또 다른 소설 ‘흰’과의 연결점도 고려한 미학적 장치다.


특히 관객들의 시선을 끈 것은 무대 뒤편 작은 창문 너머로 내리던 ‘눈’(Snow) 연출이었다. 거대한 교황청 무대에 눈을 가득 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연출가는 왜 작은 창문이라는 제약을 택했을까. 작품 속 국숫집 창문 밖으로 내리는 눈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기후 위기를 바라보는 한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깔려 있었다.


“거대한 무대와 연약한 인간의 몸 등 큰 것과 작은 것의 대비를 좋아해요. 물론 인공 눈을 활용해서 교황청 전체에 눈이 내리게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요즘 폭염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 지역은 현재 굉장히 건조해서 농부들이 마실 물도, 농작물에 줄 물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인공 물을 퍼와서 눈을 날리는 행위를 한다는 건 예술가로서, 또한 한 시민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대신 관객은 폭염 속에 있고, 저 작은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미적으로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어요. 흔들면 눈이 내리는 조그만 ‘스노우볼’ 효과를 상상하며 구상한 장면입니다.”


공연의 마지막 대목에는 한강 작가가 직접 무대에 등장해 제4장 ‘불꽃’을 낭독하는 연출이 등장한다. 한국어를 모르는 일부 프랑스 관객들에게는 갑작스러운 미 군정과 전쟁 이야기가 다소 낯설거나 의아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들리케 감독은 이것이 철저히 의도된 ‘충격 효과’였다고 말한다.


“한강 작가님을 꼭 무대에 모시고 싶었지만, 배우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두 배우의 낭독이 일종의 몽환적인 픽션의 세계라면, 마지막에 작가님이 직접 등장해 구체적인 학살의 증언을 읽어주는 것은 꿈의 세계에서 갑작스럽게 현실로 빠져나오는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갑작스러운 충격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 충격을 통해 관객들이 제주 학살에 대해 더 찾아보고, 또 다른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분단되고 갈등하는 사회입니다. 그 속에서 예술이 갖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어떤 어려움과 반대가 있더라도 꼿꼿이 수직으로 서서 맞서 싸우는 저항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비뇽페스티벌

제주 4·3 사건이나 국가 폭력과 같은 예민한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데 있어 들리케 감독이 경계하는 것은 ‘연출가의 관점 강요’다. 그는 학문적 접근보다 현장의 증언을 모으고 관계를 쌓는 방식을 취하되, 원작과 배우 뒤로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조력자로서의 연출론을 강조했다.


“예민한 주제를 다룰 때일수록 철저한 검열을 반대하고 예술의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충격을 줄 수도 있죠. 다만 그것이 나의 관점을 강요하는 선을 넘어선 안 됩니다. 연출가로서 제 역할은 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원작자와 배우들이 가진 예술성이 제 연출을 통해 무대 위에서 더 빛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 비극에 대한 공감대도 잊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부와 협력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고, 이 역사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던 만큼, 제주의 아픔을 마주하는 유럽 관객들에게도 이 작업이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중요한 소통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아비뇽에서의 뜨거운 여정을 마친 ‘작별하지 않는다 – 새’는 올가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를 통해 한국 관객을 찾는다. 가을 서울 공연에서는 스케줄상 함께하지 못하는 한강 작가 대신, 여중생 나이 또래의 소녀가 마지막 낭독을 맡아 현실로의 회기와 역사의 발견이라는 메시지를 이어갈 예정이다.


들리케 감독은 “극장 환경이 바뀌는 만큼 작은 창문을 통한 눈 연출을 한국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할지는 가을이 올 때까지 조명 디자이너와 더 치열하게 고민해 보겠다”며 한국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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