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뀔 때마다 간판만 바꾸는 나라
브랜드는 로고 아닌 축적된 신뢰
사관학교·검찰 개혁도 같은 질문
국가 브랜드는 시간이 만든다
이재명 대통령이 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지역필수공공의료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대한민국에서는 권력을 잡으면 가장 먼저 간판부터 바꾼다.
새 단체장은 새로운 시정 구호를 내걸고, 새 정부는 새로운 국정 비전을 선포한다. 청사 현판이 바뀌고, 홍보물이 바뀌며, 전광판의 문구도 달라진다. 권력이 바뀌면 이전 권력의 흔적부터 지우는 일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권력이 교체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국가는 선거의 시간이 아니라 축적의 시간으로 성장한다.
브랜드(Brand)의 어원은 북유럽 고어 brandr다. 불에 달군 쇠로 새기던 낙인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기 위한 표시였다. 브랜드의 출발은 차별성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브랜드는 차별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그 차별성을 증명할 때 비로소 브랜드가 된다.
브랜드는 로고가 아니다. 기억이다. 슬로건이 아니다. 신뢰다. 결국 브랜드는 오랜 시간 축적된 정체성이다.
뉴욕을 떠올리면 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I ❤ NY'를 기억한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시장은 수없이 바뀌었지만 뉴욕의 얼굴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어느 정치인의 치적이 아니라 도시가 축적한 공동의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낭만으로, 런던은 전통으로, 도쿄는 질서로 기억된다. 공식 브랜드가 무엇이든 세계인이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조금 다르다.
지방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시정 구호가 등장하고, 기존 브랜드의 존속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다. 민선 9기 출범 이후 경기도는 새로운 도정 비전을 내세웠고, 부산에서도 시정 브랜드 재정비가 추진되고 있다. 다른 지자체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철학을 담는 일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시정 구호와 도시 브랜드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시정 구호는 단체장의 정책 목표다. 도시 브랜드는 시민이 수십 년에 걸쳐 함께 만들어 가는 도시의 얼굴이다. 기업으로 치면 경영 방침은 바뀔 수 있어도 존재 이유까지 매번 새로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도시의 존재 이유까지 다시 정의하려 한다.
브랜드는 리모델링할 수 있지만 리셋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스위치처럼 0과 1로 작동하는 디지털 시스템이 아니다. 나이테가 한 겹씩 쌓이듯 역사도, 제도도, 브랜드도 축적되는 아날로그의 세계다. 한 겹을 잘라낸다고 나무가 새로 시작되지 않듯, 과거를 지운다고 국가의 미래가 새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태국의 어메이징 타일랜드(Amazing Thailand), 인도의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 영국의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은 단순한 관광 문구가 아니다. 오랜 시간 세계인에게 각인된 국가 이미지다.
반면 대한민국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국가를 설명하는 언어도 함께 바뀌었다.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 크레이티브 코리아(Creative Korea), 이매진 유어 코리아(Imagine your Korea), 그리고 최근의 '대체불가 대한민국'까지.
대한민국이 대체 불가능한 나라가 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체 불가능한 것은 슬로건이 아니라 국가의 신뢰여야 한다.
축적은 브랜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제도도, 조직도, 산업도, 법치도 모두 축적 위에서 성장한다.
최근 논의되는 국방 개혁 역시 같은 물음을 던진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육·해·공군사관학교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역사와 전통, 조직문화를 재편하는 것이 과연 미래를 위한 최선인지 충분히 따져봐야 한다. 제도는 바꿀 수 있지만, 축적된 정체성은 쉽게 복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 추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도는 시대에 따라 손질될 수 있다. 그러나 형사사법 체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오랜 시간 축적되는 자산이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와 설득이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반대의 처방을 반복한 결과 시장의 예측 가능성은 크게 흔들렸다. 최근에는 첨단산업의 입지 문제마저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기업과 인재, 연구기관이 함께 만들어 온 산업 생태계는 정치적 구호만으로 다시 그릴 수 있는 지도가 아니다.
브랜드를 평가할 때 기업들은 'CEO 리스크'를 가장 민감하게 본다.
최고경영자의 품격과 책임감이 기업의 신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더욱 그렇다.
지도자의 도덕성과 법치에 대한 존중은 국가 브랜드의 핵심 자산이다.
법의 원칙보다 정치적 유불리가 앞서는 듯한 모습, 사법 시스템을 둘러싼 반복되는 논란은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세계는 우리가 어떤 슬로건을 내거는지보다 어떤 원칙을 지키는 나라였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대통령은 누구나 자신의 시대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만의 시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앞선 시대의 축적 위에 더 나은 시대를 쌓는 사람이다.
새로운 시대는 과거를 삭제한다고 시작되지 않는다.
산업화도 우리의 역사이고 민주화도 우리의 역사다.
성공도 우리의 자산이고 실패도 우리의 자산이다.
잘한 것은 이어받고, 잘못된 것은 고치면 된다.
그것이 축적이다.
축적은 보수의 가치도, 진보의 가치도 아니다.
발전이 지속되는 방식이다.
민주주의에서 교체되는 것은 권력이다.
그러나 축적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다.
우리는 대통령을 새로 뽑는 것이지 대한민국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진정 '대체불가'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면, 새로운 구호를 만드는 일보다 먼저 정권이 바뀌어도 이어질 국가의 정체성과 제도, 법치와 신뢰를 쌓아야 한다.
국가 브랜드는 권력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만든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이 잠시 맡긴 책임이다.
그러나 국가는 세대를 넘어 축적되어야 한다.
ⓒ
글/ 정상환 환경국립대 객원교수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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