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극장으로㊳] 서울 성북구 극장 봄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문화의 중심지가 거대 자본이 흐르는 상업 지구로 쏠리는 사이, 예술의 본질을 지키려는 소극장들은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곤 한다. 대학로의 소란함이 한풀 꺾이는 지점. 성북구 삼선동의 좁다란 골목길로 접어들면 일상의 풍경 속에 나직이 숨은 ‘극장 봄’ 역시 이런 흐름에 저항하며, 15년째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차지성 대표는 대관료를 감당하지 못해 쫓기듯 떠나야 했던 대학로의 기억을 뒤로하고, 오직 ‘무대’가 전부인 자신만의 예술 피난처를 이곳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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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석은 없어도 된다, 무대가 전부인 극장을 만들자”
극장 봄은 2011년, 극단 더늠을 이끄는 차지성 대표의 절박한 생존 고민에서 시작됐다. 당시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려던 그에게서 대학로의 높은 대관료는 작품의 깊이를 고민하기도 전에 마주해야 하는 감당하기 힘든 벽이었다. 그는 “꼭 대학로로 관객을 불러야 할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고, 연습실과 극단이 밀집해 있던 한성대입구역 근처 삼선동에 터를 잡았다.
공간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약 50평 규모의 공간 대부분을 무대에 할애하고, 객석은 단 25~30석만을 배치한 것이다. 가로세로 9~10m에 달하는 광활한 무대는 오직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만을 담아내기 위한 고집이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유지해오다 약 5년 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는 70석 규모의 객석을 갖추게 됐다.
“당시엔 관객석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원하는 작품을 하기 위해 ‘무대 중심’의 극장을 만들어보자고 했죠. 기존 시설을 싹 철거하고 넓은 무대와 약간의 객석 그리고 분장실 정도만 남겨보자고 시작했죠. 조명기 하나, 음향 기기 하나까지 지인들에게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하며 후원받아 시작한, 그야말로 ‘앵벌이’로 만든 공간이라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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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의 공기를 담다…‘심우’에서 ‘미아리고개’까지
극장 봄은 단순히 공간을 빌려주는 물리적인 장소를 넘어, 성북이라는 지역의 역사와 삶을 연극으로 기록하는 ‘스토리텔링의 거점’ 역할을 수행한다. 차지성 대표가 이끄는 극단 더늠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인 심우장에서 14년째 뮤지컬 ‘심우’를 이어오고 있다. 이는 지역 문화재 활용 사업의 우수 사례로 꼽히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내달 6일과 7일에도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극장의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작품은 미아리고개의 사연을 담은 연극 ‘특별한 손님’이다. 6.25 전쟁 당시 통곡의 고개이자, 현대에 이르러 점술집이 모여든 미아리고개의 굴곡진 역사를 시각장애인 점성술사의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지역 극장이다 보니 지역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 극단은 지역 스토리텔링 작업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특별한 손님’은 극단 20주년, 극장 10주년을 기념해 올린 공연인데, 미아리 고개 밑 한성대와 성신여대 사이 골목에 신장개업한 점성술사의 이야기를 담았죠. 우리 극장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차 대표는 인근 한성대학교와 MOU를 맺고, 고려대학교 연극 동아리 학생들과 협업하는 등 지역 대학가와 연계하여 젊은 창작자들에게 컨설팅과 필드 경험을 제공하는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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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15년의 약속’
수익을 내기 힘든 민간 소극장이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온 비결에는 차 대표의 신념과 더불어,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건물주와의 따뜻한 연대가 있었다.
“건물주분께서 처음 들어올 때 ‘극장을 하는 동안은 월세를 올리지 않겠다’고 구두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15년째 지켜주고 계세요. 그런 분을 만났다는 것이 정말 큰 복이죠. 덕분에 저희도 대관료를 저렴하게 책정하고, 셋업 기간을 길게 가져가면서 예술가들이 밤샘 작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차지성 대표 역시 후배 예술가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두고 있다. 극장 봄은 일 년 중 일부 기간을 일부러 비워두는데, 이는 예산과 기획력이 부족해 무대를 찾지 못하는 신진 단체나 갓 졸업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다.
“계획을 미리 짜기 힘든 졸업생이나 학생, 초창기 극단들은 대관을 잡는 것부터가 일이에요. 그런 분들을 위해 주말 이틀만이라도 공연할 수 있게 일부러 기간을 비워둡니다. 주말 대관만 오픈하면 일주일이 통째로 비어버리는 리스크가 있지만, 1년에 한두 달 정도는 그 리스크를 우리가 안고 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선배들과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인생에 한 번 정도는 누군가의 시작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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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통용되는 안전한 예술의 피난처가 되길”
차 대표는 현재 중견 연출가들을 위한 ‘극적 무대’ 페스티벌과 지역의 기억을 다루는 ‘기억 연극제’를 통해 소외된 연극인들을 아우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청년이나 원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원 사업의 사각지대에 놓인 중견 예술가들에게 “극장은 있으니 여기서 한번 스타트해보자”고 제안한 것이 벌써 5년째다.
그가 꿈꾸는 극장 봄의 미래는 명확하다. 국공립 극장의 엄격한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한 ‘자유로운 실험’이 허용되는 공간, 그리고 안전하면서도 파격적인 상상이 현실이 되는 무대다.
“다른 극장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극장이 되었으면 해요. 무엇보다 예술가들이 극장 봄을 거쳐 가며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관객들이 ‘극장 봄, 한 번쯤 들어봤어’ ‘다시 가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자유로운 극장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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