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장난감 고치고 손맛 나누고 기술 잇고…은퇴 뒤 다시 열린 일터

박진석 기자 (realstone@dailian.co.kr)

입력 2026.05.11 12:00  수정 2026.05.11 12:00

부산 우리동네 ESG센터서 장난감 수리·페트병 자원순환

울산 고려아연·대나무향기서 기술전수·공동체사업단 운영

우리동네 ESG센터 1호점. ⓒ보건복지부

버려진 장난감은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다. 공장 현장을 지켜온 숙련 기술은 청년 직원에게 전해진다. 오래된 손맛은 동네 식탁을 채운다. 노인 일자리가 단순한 소득 보전 사업을 넘어 지역사회와 산업 현장을 잇는 생활형 일자리로 넓어지고 있다.


초고령사회에 들어선 한국에서 노인 일자리는 더 이상 주변 정책이 아니다. 11일 보건복지부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올해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규모는 115만2000개다. 국비 기준 예산은 2조3851억원이다.


2004년 2만5000명 수준으로 시작한 사업은 올해 115만개를 넘어섰다. 일하고 싶은 노년이 늘어난 만큼 일자리의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부산 금정구 ‘우리동네 ESG센터 1호점’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곳은 노후 공실을 활용한 자원순환 거점센터다. 2022년 금정점 개소를 시작으로 부산 16개 구·군으로 확대되고 있다. 참여자는 60명이다.


PET순환팀, 장난감순환팀, 장난감수리팀, 안전손잡이 설치팀, 인포메이션팀, 도서관리팀으로 나뉘어 주 3회, 하루 5시간씩 일한다.


일은 작지만 가볍지 않다. 버려진 장난감과 PET플라스틱을 분류하고 고장 난 장난감을 수리한다. 폐플라스틱으로 업사이클링 안전손잡이를 만들어 주거 취약계층 가정에 설치한다. 환경도슨트로 시민에게 탄소중립 교육도 한다.


참여자인 이충남(67) 씨는 장난감 수리에 대해 “표면 스티커와 못 쓰는 건전지 외에는 부품을 모아 다시 쓴다”며 “이거야말로 진짜 업사이클링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고려아연 ‘세대통합형’ 현장실습훈련 지원 사업.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일자리는 노년의 하루도 바꾸고 있다. 조선소 관련 업무를 하다 퇴직한 이 씨는 한동안 쉬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가 비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코끼리공장으로 시작한 센터에서 일하게 된 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시 찾아갈 곳이 있다는 마음에 살아 있구나라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울산 고려아연에서는 산업 현장의 경험이 일자리로 이어졌다. 이곳은 현장실습훈련 지원사업 중 ‘세대통합형’에 참여하고 있다.


고려아연 세대통합형 일자리는 30년 이상 현장을 지킨 퇴직자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다시 산업 현장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공정 이해도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신입 직원에게 작업 절차와 안전 수칙을 알려주는 사내 강사 역할도 맡는다.


올해 신규 지원 인원은 14명이다. 이들은 금속가공과 설비 관리 등 기존 업무에서 쌓은 숙련을 바탕으로 신입 직원에게 작업 노하우를 알려준다. 조영렬(61) 씨는 “아침에 일어나 갈 데가 있다는 게 상당히 좋다”고 말했다.


권오영(61) 씨는 “후배들이 글로만 배운 공정의 흐름을 현장에서 직접 짚어주면 작업 이해도가 달라진다”고 했다. 김의식(61) 씨도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 직접 만든 자료로 교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은퇴 뒤 끊길 뻔한 기술이 다시 현장에 남고 청년 직원에게 이어지는 셈이다.


울산남구시니어클럽 공동체사업단 대나무향기. ⓒ보건복지부

울산 남구 ‘대나무향기’는 공동체사업단의 사례다. 울산남구시니어클럽이 수행기관이고 참여자는 50명이다. 주 2~3일, 하루 3~4시간씩 조별로 일한다. 조리팀과 고객응대팀으로 나뉘어 식품 제조와 세척, 손님 응대를 맡는다. 직접 담근 장류와 조미료를 쓰지 않는 음식으로 지역 손님을 모은다.


이곳에서 일하는 하춘자(72) 씨는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분이 좋다”며 “일하면서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어 좋다”고 했다. 신영순(65) 씨도 6년째 대나무향기에서 일하고 있다. 집에서 해오던 음식 솜씨가 일자리로 이어진 사례다.


노인 일자리는 참여자에게 소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해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실태조사에서는 참여 이유로 경제적 동기가 74.5%로 가장 높았다.


동시에 참여자들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좋아지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감과 자존감이 생겼다고 응답했다. 대기자에게는 일자리에서 떨어진 뒤 ‘집안에만 있어 답답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김수영 노인인력개발원장은 “노인 일자리가 청년에게 어르신이 경험을 전수하는 방식뿐 아니라 청년이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방식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며 “이런 세대통합형 일자리가 앞으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며 제도적으로 확대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노년의 일은 이제 복지의 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장난감을 고치는 손, 공장 기술을 전하는 목소리, 점심 한 끼를 준비하는 손맛이 지역 안에서 다시 쓰이고 있다. 일자리는 어르신에게 갈 곳을 만들고 지역에는 필요한 일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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