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이 바꾸고, 성대까지 갈아끼웠다”…‘헬스키친’ 김수하의 집념 [인터뷰]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9.17 08:32  수정 2026.09.1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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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키친'서 주인공 17세 앨리 역

“낯설었던 앨리샤 키스 음악...연습만이 살길”

11월 18일까지 GS아트센터 공연

“제가 흔들리면 무대 전체가 흔들린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뮤지컬 ‘헬스키친’ 아시아 초연의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김수하는 최근 외부 스케줄을 잡지 않고 있다. 10대 소녀 앨리의 호흡을 따라 극이 전개되는 만큼, 자신의 컨디션 하나가 공연 전체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것을 체감해서다. 매일 흔들림 없는 무대를 올리기 위해 스스로를 지독할 정도로 예민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김수하의 앨리는, 치열한 고민의 흔적과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함께 묻어난다.


서울 GS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헬스키친’은 2024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토니어워즈 13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 2025년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뮤지컬 시어터 앨범상’을 수상하며 평단을 뒤흔든 최신 화제작이다. 팝의 아이콘 앨리샤 키스가 무려 13년간 제작 전반을 진두지휘하며 자신의 유년기와 음악적 자양분을 녹여냈다. 특히 이번 한국 무대는 브로드웨이 개막 이후 약 2년 만에 성사된 ‘전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으로 전 세계 공연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뮤지컬 배우 김수하 ⓒPL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의 중심에 선 김수하는 영국 웨스트엔드 ‘미스 사이공’의 킴 역으로 데뷔한 이래,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렌트’ ‘하데스타운’으로 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한국 뮤지컬계의 독보적인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배우다. 그러나 정통 클래식 뮤지컬 발성에 뿌리를 둔 그에게 90년대 뉴욕의 R&B, 소울, 힙합 비트로 채워진 앨리샤 키스의 음악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뮤지컬 배우를 꿈꾼 이후 제 인생엔 뮤지컬밖에 없었습니다. 가요나 팝은 거의 듣지 않았고 오직 정통 뮤지컬 넘버만 부르며 훈련받았죠. 그런데 ‘헬스키친’은 시작부터 답이 보이지 않았어요. 대학 입시 이후 이렇게까지 미친 듯이 연습에만 매달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작품마다 발성을 달리 해야 하는 과정을 두고 ‘성대를 갈아 끼운다’고 표현한 그는 정규 연습이 끝난 뒤에도 연습실을 떠나지 못했다. 보컬 코치에게 추가 연습을 청하고 점심시간마저 반납하며 연습에 매달렸다.


“공식 연습이 끝나는 오후 6시가 지나도 제 기준을 채우지 못해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집에 들어가면 밤늦게 큰 소리로 노래할 수 없으니,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연습했습니다. 원곡자인 앨리샤 키스의 숨소리와 애드리브를 집요하게 분석하고, 그루브를 체화하기 위해 수백 번을 반복해 불렀죠.”


뮤지컬 배우 김수하 ⓒPL엔터테인먼트

보컬 못지않게 까다로웠던 과제는 신체 훈련이었다. 브로드웨이 명장 마이클 그라이프 연출과 아프리칸 디아스포라 기반의 현대무용으로 정평이 난 카밀 A. 브라운 안무가가 설계한 ‘헬스키친’의 무대는 춤이 곧 서사이자 대사다. 특히 한국 초연은 케이팝 최정상 안무팀 출신의 전문 댄서들을 댄스 앙상블로 전격 기용해 스트릿 컬처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익혀 척추와 상체의 정렬(박스)을 단단히 유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던 김수하에게, 10대 길거리 힙합의 유연한 움직임은 정반대의 문법이었다.


“가발을 쓰고 의상을 갖춰 입으면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게 함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각적인 모습 뒤에 감춰진 걸음걸이나 제스처가 한국 배우 김수하 그대로라면 관객을 설득할 수 없으니까요. 발레 특유의 세워진 상체를 무너뜨리고, 억눌린 답답함과 반항심이 몸짓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도록 미국 또래 청소년들의 영상 자료를 찾아보며 신체 언어를 다시 구축했습니다.”


함께 무대에 오른 전문 댄서들과 소울 보컬리스트 이미쉘(타이니 역)의 감각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박자를 미세하게 뒤로 밀어 타는 ‘레이백’(Layback)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 무대 뒤편에서 동료들의 호흡을 관찰하고 따라 하기를 반복했다. 오프닝을 여는 군무 장면 ‘가스펠’에서 앨리가 완전한 해방감과 자유를 누리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극 전체의 설득력이 무너진다는 판단에서였다.


뮤지컬 '헬스키친' 공연 장면 ⓒ에스앤코

극 중 앨리는 과잉보호로 자신을 옭아매는 싱글맘 저지(박혜나·최현선 분)와 끊임없이 부딪히며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17세 소녀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십대에 접어들며 인간적 성숙을 이룬 김수하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지점은 ‘철없던 사춘기 시절의 미성숙함으로 되돌아가는 연기’였다.


“대본을 읽을수록 자꾸 엄마의 입장에 이입이 되더라고요(웃음). ‘앨리는 왜 이렇게까지 엄마 속을 썩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죠. 협력 연출진 역시 배우들이 부모와 스승의 마음을 지나치게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인물 간의 갈등을 선명하게 살리기 위해서는 어른의 이해심을 내려놓고, 세상 모든 것이 불만스럽던 질풍노도의 날 선 감정으로 철저히 퇴행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학창 시절의 모범생으로 기억하던 그였지만, 객석에서 공연을 지켜본 부모님은 “네 어릴 적 모습 그대로”라며 혀를 내둘렀다. 교복을 줄여 입고 방학마다 염색을 꿈꿨으나 엄격히 통제받았던 기억, 통 넓은 바지 대신 핫팬츠를 입었다가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유년의 기억은 무대 위 저지와 앨리의 팽팽한 대립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직전 대표작인 ‘렌트’의 미미와 이번 ‘헬스키친’의 앨리를 비교하는 대목에서도 캐릭터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렌트’의 미미가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꺼져가는 불씨를 처절하게 붙드는 인물이었다면, ‘앨리’는 이제 막 세상 밖으로 싹을 틔우는 시작의 인물입니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야생화 같은 생명력 그 자체죠. 나이 든 관객에게는 ‘나도 한때는 저렇게 치열했지’라는 향수를, 동시대 청년들에게는 ‘나만 이 답답한 어둠 속에 갇힌 것이 아니구나’라는 연대의 위로를 건네고자 했습니다.”


뮤지컬 '헬스키친' 공연 장면 ⓒ에스앤코

‘헬스키친’은 단순한 10대 성장기를 넘어 인종과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 서사의 깊이를 지닌다. 앨리의 숨겨진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세상과 마주할 단단한 자아를 심어주는 스승 미스 라이자 제인(정영주·김영주 분), 딸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엄마 저지,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앨리까지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연대가 무대 위를 묵직하게 채운다.


김수하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흉내 내는 데 매몰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에 집중했다.


“미스 라이자 제인 선생님이 피아노 한 대를 두고 노래하는 1막 후반부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한 번쯤 겪게 되는 차별과 부당함, 벽에 부딪혔을 때의 무력감에 집중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멜로디에서 코드로, 다시 리듬으로 변주해 나가는 피아노 레슨 장면을 통해 앨리가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고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매 공연 무거운 워커를 신고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느라 관절에 무리가 올 때면, ‘지금의 나이가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역’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그다. 그러나 30대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의 김수하는 한결 초연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20대에는 모든 배역을 다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서른을 넘기며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게 됐죠. 내 인연이 아닌 것은 아무리 움켜쥐려 해도 빠져나가고, 내 몫의 인연이라면 결국 나를 찾아온다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제게 온 앨리는 그 어떤 인물보다 애틋하고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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