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반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시절, 조선 관군이 거둔 첫 번째 지상 승전이 있었다. 서기 1592년 6월 25일, 경기도 양주 해유령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승리를 이끈 장수는 부원수 신각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비극은 전투 결과가 아니라 그 이후에 있다. 전투에서 승리한 신각은 선조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해유령 전투가 벌어지기 전, 조선 조선의 상황은 처참했다. 선조는 이미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한 뒤였다.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진 중이었다.
우리는 부산진성의 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 그리고 다대포의 윤흥신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휘관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겁에 질려서 도망쳤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은 동래성에서 함께 싸우지는 송상현의 요청을 거부하고 줄행랑을 쳤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균 역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방어를 포기하고 판옥선을 자침시킨 다음 도주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서 병력들을 긴급 소집해서 출동을 준비 중이었고, 권율과 곽재우 같은 인물들이 이제 의병들을 규합하는 시점이었다.
한양의 성벽 ⓒ직접촬영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진격 앞에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울 때 신각 장군은 조용히 양주에 머물면서 군세를 규합했다.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배하고,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을 남겨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한다. 하지만 쓸만한 병력 들은 신립 장군이 모두 끌고 내려간 상태였다. 결국. 제대로 된 방어전도 치르지 못하고 개성으로 퇴각해서 임진강에서 다시 방어선을 폈다. 하지만 부원수 신각은 이때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일본군의 이동로 중 하나인 해유령 일대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이동하고 있는 일본군을 기습한 것이다. 선조수정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에서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수급 70개라면 최소 70명을 사살했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더 많은 일본군이 죽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개전 이래 조선 관군이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의미 있는 승리였다. 바다에서는 이미 이순신이 옥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의병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육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반격이 이루어진 것은 해유령이 처음이었다. 전과를 보면 국지전이었지만 그 상징성은 컸다. 육지에서도 일본군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각에게 돌아온 것은 공적에 대한 포상이 아니었다.
신각이 승전을 올리고 있는 사이, 임진강 방어선에서는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부대가 일본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김명원 측은 자신들의 패배 책임을 신각에게 돌렸다. 신각이 독단으로 부대를 이끌고 해유령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임진강 방어가 무너졌다고 보고한 것이다. 김명원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은 선조는 신각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그의 어처구니없이 죽는 과정이 남겨져 있다.
김명원은 신각이 양원을 따른다고 핑계 대고 도망쳤다는 것으로 장계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홍이 그대로 믿고서 선전관을 보내어 현장에서 베도록 청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첩서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는 복합적이다. 초반에 지휘관들이 도망치고 군대가 붕괴되는 일이 반복되자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패닉에 빠졌다. 거기다 한양은 물론 개성까지 뺏기자 위기감에 몰린 상황에서 신각이 도망쳤다는 김명원의 장계를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다. 뒤늦게 신각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자 서둘러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실록의 다음 부분에는 나라에 몸 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했다면서 다들 안타까워했다고 덧붙여있다. 군법에는 대장의 명령 없이 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친 것은 군율 위반이었다. 하지만 그 위반이 패전이 아니라 승전으로 이어졌으며, 그리고 임진강 방어 실패의 원인이 정말 신각에게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해유령 전투와 신각의 죽음은 임진왜란 초반 조선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공을 세운 사람이 제도의 경직성과 정치적 책임 전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신각이 살아남아서 제대로 지원을 받고 전투에 나섰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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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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