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사투리에도 검열 시선
오웰의 뉴스피크 넘어선 자기검열
"누가 허위를, 누가 혐오를 정하나"
침묵의 나선이 만드는 조용한 붕괴
2일 오후 서울 강동구 배재고등학교 앞에 놓여 있던 배재고 야구부 비판 및 응원 화환이 수거되는 중 시민들이 항의하고 있다. ⓒ 뉴시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 문장이다.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이 구절은 인간이 왜 ‘말하는 존재’인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생각을 나누고, 질문하고, 토론하며 공동체를 만든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re)의 본래 뜻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함께 말하는 기술이며, 함께 듣는 제도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말은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스타벅스를 가지 않으면 존중이 생길까. 사투리 어미 '~노'를 쓰지 않으면 사랑이 생길까. 5분 23초, 5시간 23분, 5월 23일을 달력에서 지우면 누군가를 더 존경하게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입이다.
그리고 입이 닫히면 민주주의도 함께 늙기 시작한다.
최근 대중문화계에서는 스물두 살 아이돌이 거제도 사투리로 "무섭노"라고 말했다가 사상 검증의 재판대에 올랐다. 인기 드라마의 초시계는 '5분 23초'라는 숫자만으로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았고, 배우와 가수, 운동선수들은 말끝 하나, 숫자 하나, 사진 한 장까지 해명해야 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무엇을 말할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면 안 되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사회가 되었다.
맥락은 사라지고 기호만 남는다. 이해보다 의심이 앞서고, 비평보다 낙인이 먼저 달려온다.
사람들은 표현하는 법보다 표현을 피하는 법부터 배운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뉴스피크(Newspeak)'를 경고했다.
권력이 단어를 없애면 사람은 결국 그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전쟁'을 '평화'라 부르고, '거짓'을 '진실'이라 이름 붙이면 언어는 권력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오웰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는 굳이 권력이 단어를 금지할 필요조차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입을 닫기 때문이다. 사회적 낙인과 고립이 두려워 표현을 삼가고 말을 줄인다.
권력이 검열을 명령하지 않아도 사회가 서로를 검열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서서히 위축된다.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노엘 노이만(Noelle-Neumann)은 이를 '침묵의 나선(The Spiral of Silence)'이라 설명했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자신의 의견이 다수와 다르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들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고립되기 싫어서 침묵한다. 그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낳고, 결국 사회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척'하는 곳으로 변해 간다.
나는 국가의 검열보다 이 자발적 자기검열이 더 두렵다.
최근 정부와 여권은 가짜뉴스와 허위정보, 혐오표현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했다. 허위정보를 막자는 취지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과연 누가 허위를 결정하는가.
누가 혐오를 정의하는가.
그 기준이 모호하고 권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수록 국민은 표현보다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법이 직접 입을 막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아서 말을 줄인다.
입을 막는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 입을 닫게 만드는 사회다.
역사는 진실을 독점한 권력이 얼마나 고압적이고 무모했는지 보여준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섰다. 당시에는 허위였지만 오늘날에는 상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셨지만 지금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치 독일 역시 '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언론을 침묵시켰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 믿었고, 역사는 언제나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해 왔다.
우리 역시 휘몰아치던 괴담과 선동의 시대를 지나왔다.
6·25전쟁 북침설부터 광우병 괴담, 천안함 음모론, 사드 괴담,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에 이르기까지, 광풍처럼 몰아치는 거짓이 도리어 '지배적 여론'의 가면을 쓰고 합리적 상식을 침묵의 나선 속으로 밀어 넣었던 서글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괴담의 위험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권력이 진실을 심판하려 하지는 않았다.
법과 규제로 입을 막는 순간 민주주의가 더 큰 위험과 마주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공동체의 토론과 검증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법조문으로 판결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적 여론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시끄럽고 불편하더라도 토론과 반론, 검증과 시간이 쌓여 사회가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국가가 나의 생각을 재단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가는 시민의 생각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다.
시민이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를 지키는 보루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불편한 말을 견디는 제도다.
틀린 말도, 거친 말도, 심지어 어리석은 말까지 감당할 수 있는 복원력이 있을 때 건강하다.
표현의 자유는 오직 옳은 사람만을 위한 권리가 아니다.
틀릴 자유와 반박받을 자유까지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독재자의 구두굽만이 아니다.
입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눈치를 보는 국민, 혹시 문제가 될까 문장을 고치는 언론, 괜한 오해를 살까 숫자 하나까지 헤아려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침묵의 나선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권력이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스스로 입을 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늙어간다.
무섭지 않은가.
ⓒ
글/ 정상환 환경국립대 객원교수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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