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막을 '마지막 카드'…21년간 봉인된 제도, 다시 수면 위
1969년·1993년·2005년 네 차례뿐…반도체 산업 첫 적용 가능성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 장관의 딜레마…노동계 "발동 땐 총투쟁"
파업 강행 땐 정치 부담도 변수…친노동 정부 첫 발동 여부 촉각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삼성전자 노사가 20일 마지막 협상 테이블에서도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총파업 예정일은 내일(21일)이다. 이제 모든 시선은 한 사람에게 쏠린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긴급조정권 발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자다.
"불가피" vs "성급"…엇갈린 정부 내 목소리
정부 내에서는 이미 온도차가 뚜렷하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14일 페이스북에 "파업이 발생한다면 긴급조정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고 직접 언급했다. 정부 내에서도 긴급조정권 검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17일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경제 보호를 위해 긴급조정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대응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국무회의에서 "세금도 떼기 전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제도적으로 나눠 갖는 것은 투자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노조 요구에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반면 정작 결정권자인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줄곧 다른 말을 해왔다.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 "긴급조정권 언급은 성급하다." 이날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의 사후조정 결렬 직후에도 홍경의 노동부 대변인을 통해 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대신 그는 오후 4시 20분쯤 경기지방고용노동청에서 삼성전자 노사를 직접 불러 자율교섭 재개를 시도했다. 박수근 중노위 위원장도 이날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 질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민노총 위원장이 파업을 막아야 하는 현실
김영훈 장관의 이력은 이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코레일 기관사 출신이자, 역대 최초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1992년 철도청에 입사해 기관사로 일했고, 2004년 철도노조 위원장에 당선됐다. 이후 2010년에는 42세로 민주노총 역대 최연소 위원장에 올랐다. 2006년에는 3·1 철도 전국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내며 노동기본권 보호를 위해 20일 넘는 단식투쟁까지 벌였던 인물이다. 2012년 위원장 직선제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중도사퇴했다.
그런 그가 지금 국내 반도체 산업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파업을 강제로 중단시킬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번에도 "긴급조정권 발동 시 강력히 투쟁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발동 결정을 내리는 순간,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이 가장 강하게 반대해온 수단을 스스로 꺼내는 셈이 된다.
김 장관은 이날 SNS에 "불광불급(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희망은 절망 속에 피는 꽃. 끝나야 끝난다"라고 적었다. "선 지키며 책임 있고 삼성답게", "파업보다 어려운 건 교섭"이라는 해시태그도 달았다. 직접 중재에 나선 장관의 심경이 담긴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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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만의 카드…꺼낼 수 있을까
긴급조정권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76조에 근거한다. 쟁의행위가 국민경제를 현저히 해하거나 국민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현존할 때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동할 수 있다. 발동 즉시 30일간 파업이 금지되고 중노위 조정 및 중재 절차가 진행된다. 중재 결과는 단체협약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1963년 제도 도입 이후 발동 사례는 4건이 전부다. 1969년 대한조선공사, 1993년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대중공업 등 7개 계열사) 파업, 2005년 아시아나항공 조종사(파업 24일 만), 2005년 대한항공 조종사(파업 3일 만). 이번에 발동되면 21년 만이다.
4건 중 절반은 발동 이후 노사 자율합의로 마무리됐다. 1969년 대한조선공사는 발동 사흘 만에, 1993년 현대그룹 파업은 발동 하루 만에 합의가 이뤄졌다. 나머지 2005년 두 건은 조정이 결렬돼 강제 중재로 마무리됐다. 특히 1993년 현대그룹 파업 사례는 제조업에 처음 적용된 선례로, 반도체 제조업인 삼성전자와 가장 가까운 비교 대상으로 꼽힌다. 2016년 현대차 노조 파업 당시에도 긴급조정권 검토 가능성이 거론되며 노사 압박 수단으로 활용된 바 있다.
발동을 가로막는 변수도 만만치 않다. 전국금속노조는 "발동 시 강력한 투쟁에 나서겠다"고 경고했고, 한국노총도 "노동기본권을 제한하는 최후의 비상수단"이라며 반대 입장을 냈다. 삼성전자 파업 하나를 막으려다 자동차·조선·철강 전 금속 사업장으로 파업이 번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명박·박근혜·윤석열 등 보수 정권에서도 실행하지 않은 긴급조정권을 친노동을 표방해온 이재명 정부가 발동할 경우 정치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날 오후 경기지방고용노동청에서 재개된 김 장관 주재 교섭이 마지막 변수다. 노동부는 교섭 종료 후 장관이 직접 브리핑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내일 아침 총파업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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