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구금·가혹행위로 자백 임의성 인정 어려워"
"평화통일 방안 언급만으로 반국가단체 찬양 못해"
서울고등법원이 위치한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뉴시스
북한의 통일방안을 지지하는 취지의 말을 들었지만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고등학교 교사가 5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구회근)는 지난 9일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됐던 고(故) 성기호씨의 재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성씨는 부산대 사학과 재학 당시인 1968년 외삼촌의 친구로부터 북한 활동에 동조하는 내용의 말을 들었지만 이를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70년에는 외삼촌으로부터 북한의 통일 관련 선전을 듣고도 신고하지 않은 혐의가 추가됐다.
당시 적용된 구 반공법에는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하는 등의 사실을 알고도 수사기관 등에 알리지 않은 경우 처벌하는 규정이 있었다.
성씨는 1972년 징역 1년 6개월과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과 자격정지 1년 6개월로 형이 줄었고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1973년 4월 판결이 확정됐다.
성씨는 1994년 9월 사망했다. 이후 자녀가 지난해 9월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재심 절차를 진행했다.
재판부는 당시 수사 과정에서 성씨가 불법적으로 구금된 정황에 주목했다.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수사과 기록에는 수사관들이 1972년 3월 22일 성씨를 임의동행한 것으로 기재돼 있지만 구속영장은 닷새 뒤인 3월 27일 집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피고인은 적어도 5일간 불법으로 구금됐던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성씨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72년 3월 17일 직위해제됐다가 이듬해 4월 면직된 사실도 불법 구금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사정으로 제시됐다.
특히 재판부는 성씨가 불법 체포·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당해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진술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판단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도 이런 상태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검사가 이를 해소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검찰에서 작성된 성씨의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서에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기존 재판에서 제출된 다른 증거만으로도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봤다. 성씨가 외삼촌과 외삼촌의 친구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했다는 점을 알면서도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당시 성씨가 들었다고 인정하더라도 '남북한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 방안'에 관한 언급만으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인 해악을 끼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이 있는 찬양·고무 행위라고 볼 수 없다며 "공소사실은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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