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잡으려다 생계 잡을라…농지 전수조사의 딜레마 [세종 백브리프]

배군득 기자 (lob13@dailian.co.kr)

입력 2026.09.22 10:22  수정 2026.09.2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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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데이터가 낳은 284만 필지의 경고와 실경작자 보호의 과제

투기 척결이라는 거대한 명분 뒤에 가려진 고령 농민들의 처분 공포

소유 규제 중심의 낡은 농지법과 47% 임대차 현실의 충돌

투기 농지를 겨눈 전수조사의 그물이 고령 농민과 임차농의 생계까지 흔들고 있다. 처분과 구제의 기준보다 284만 필지라는 ‘의심 통계’가 먼저 공개되면서 농촌 현장의 불안이 커졌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정부와 여당이 최근 발표한 농지 전수조사 후속 대책은 대한민국 농지 제도가 직면한 구조적 모순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기본조사를 마친 1013만 필지 중 27.0%에 달하는 284만 필지가 농지법 위반 의심 대상으로 일괄 공개되면서, 현장에서는 투기 목적의 불법 농지와 생계형 임차농의 경작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 처분 공포가 확산했다.


이번 혼선은 1996년 제정된 ‘경자유전’ 원칙의 소유 규제 중심 법령과, 전체 농지의 47%가 임대차로 운영되는 농촌 현장의 거대한 괴리 속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투기 척결이라는 명분 속에서 정작 처분과 구제의 명확한 잣대는 뒤로 밀렸고, 행정자료상 의심 규모만 앞세운 정책 집행의 오류가 현장의 혼란을 자초했다.


LH 직원들의 신도시 농지 투기 의혹은 농지취득 심사와 사후관리의 허점을 드러냈다. 정부는 사태가 불거진 뒤에야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 136만㏊를 대상으로 첫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LH 사태가 촉발한 30년 만의 메스로드


지난 2021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농지 투기 의혹은 기존 농지관리 제도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영농 의사가 전혀 없는 공직자들이 개발 예정지 농지를 대거 사들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기존의 농지취득자격증명과 사후관리 제도가 투기를 걸러내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국민적 비판이 빗발쳤다.


이에 정부는 농지위원회 심의와 임대차 신고 제도를 전격 도입하고, 처분명령 불이행 시 부과되는 이행강제금을 대폭 강화하는 등 고강도 규제 신설에 나섰다.


그러나 규제의 그물을 촘촘히 짜더라도 이미 전국에 깔린 농지가 실제 어떤 상태로 이용되는지 파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지방정부가 매년 실시해 온 농지 이용실태조사는 토지거래허가구역이나 농업법인 소유 등 위험도가 높은 일부 대상을 선별해 전체의 10~15%만을 점검하는 표본 방식에 머물렀다.


이 한계로 인해 조사망을 비껴간 수많은 농지에서는 소유자와 경작자가 일치하지 않거나 장기간 방치되는 사례가 구조적으로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림축산식품부는 1996년 1월 1일 이후 취득한 농지 136만 헥타르(㏊)를 대상으로 건국 이래 최초의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농지대장, 농업경영체 등록정보, 직불금 및 면세유 영농자료, 항공·위성사진 등을 다각도로 교차 검증하지 않고서는 투기 자본을 적발할 수도, 실효성 있는 농지 개혁을 단행할 수도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박석두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장은 국회 토론회에서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와 임차농 비중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소유 규제 중심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농업적 이용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대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가데이터처 표본조사에 따르면 농지 임대차 비중이 이미 47%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자경(自耕)을 원칙으로 설계된 1996년의 농지법과 현장 현실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전수조사는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현장조사와 소유자 소명이 끝나기도 전에 전체 조사 대상의 27.0%인 284만 필지가 위반 의심 농지로 분류됐다. ‘의심’이 ‘처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일부 임차농은 경작지에서 밀려날 위기에 놓였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행정 편의적 통계가 빚어낸 정책 신뢰의 균열


기본조사 결과 불법 임대차 의심 21.1%, 무단 휴경 11.6%, 불법 전용 9.0%, 소유 제한 위반 1.4% 등 전체의 27.0%가 행정자료상 의심 대상으로 분류됐다. 필지 중복을 감안하더라도 '284만 필지'라는 거대한 숫자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현장조사와 소유자 소명이 완료되기도 전에 잠정 통계가 여과 없이 노출되면서, 농촌 현장에서는 '의심 농지'가 곧 '강제 처분 대상'으로 오인됐다. 행정 데이터만으로는 거주지 이탈이나 허위 영농계획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정부 스스로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윤원습 농림축산식품부 농업정책관은 “거짓·부정 취득인지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당사자가 소명하고 그 내용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행정처분은 철회될 수 있다”고 밝혔다. 취득 당시의 계획과 영농 이력, 소유자의 소명을 종합적으로 심사해야 마땅한 사안임에도, 거대한 처분 공포가 먼저 고령의 농민들을 강타한 것이다.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현장에서 땀 흘려 농사짓는 임차농들에게 번졌다. 일부 지주들이 전수조사 적발에 따른 처분을 회피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임대차계약을 해지하거나 자경하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다수의 선량한 임차농과 친환경 농가들이 하루아침에 경작지를 잃고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농어민신문은 지난 7월 대전에 거주하는 지주 B 씨가 정부의 농지 전수조사 발표 직후, 현장에서 수년간 농사를 지어 온 임차농 A 씨에게 "본인이 직접 농사지어야 한다"며 일방적으로 경작 중단을 통보하고 계약을 해지한 사례를 보도했다.


또 같은 달 경기신문 역시 경기 여주·이천 등 농촌 지역의 임차농들이 "농사를 잘못 지은 것도 아닌데 전수조사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지주로부터 땅을 빼앗기다시피 비워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현장 목소리를 전했다.


이에 대해 농민단체들은 농지 전수조사의 취지보다 획일적인 조사와 후속 처분 방식에 우려를 제기했다. 지역 농업인단체에서는 고령농의 관행적 임대차와 임차농 중심의 경작구조를 투기성 농지와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면 실경작자가 농지를 잃거나 과도한 이행강제금을 부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국농민회총연맹도 후속대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임차농의 경작권 보장과 고령농의 농지 처분·위탁 통로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송재일 명지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현행 농지법은 실질적 경작자인 임차농을 두텁게 보호하지 못해 수많은 농가가 법적 불안정성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며 “현대적 의미의 경자유전 원칙은 단순한 소유 규제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실경작자의 안정적인 경작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면 재해석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정부가 미확인 임대차 특별정비기간을 연장하고 농지은행 위탁 물량을 보완조사에서 제외하는 등 뒤늦게 진화에 나섰으나, 제도의 순서가 뒤바뀌며 발생한 정책적 신뢰 훼손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는 조사를 시작한 뒤에야 투기 농지와 고령농의 관행적 임대차를 구분하기 위한 특별법 마련에 나섰다. 투기에는 엄정한 처분을 적용하되 실경작자의 경작권을 보호할 기준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데일리안 배군득 기자(생성형AI를 활용해 제작했으며, 수치와 내용은 기자가 검수함.)
투기와 관행의 분리…특별법이 가를 농정의 명운


이 같은 혼선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를 거쳐 투기와 농촌 현실을 정교하게 분리하는 후속 대책의 방향성을 확정했다. 허위 영농계획으로 취득 후 휴경·임대한 농지, 농업법인이 부동산업에 악용한 농지, 개발이익을 노린 공유지분 취득 등 명백한 투기 목적의 위반 사항은 법과 원칙에 따라 엄단하기로 했다.


또 상속·이농으로 인한 소유 상한 초과, 교환 경작, 고령농의 부득이한 휴경이나 관행적 임대차에는 자진 정비와 농지은행 위탁 기회를 부여해 연착륙을 돕는다는 방침이다. 다만 현행 농지법의 경직된 체계 안에서는 이러한 선별적 구제가 불가능하다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윤 정책관은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위반사항에 대해 처분을 경감해 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어 특별조치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사를 먼저 벌인 뒤에야 처분을 유예하고 관행을 양성화할 특별법을 논의해야 하는 현실은, 이번 정책 추진 과정의 뼈아픈 실책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특별법이 자칫 투기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무분별한 사면법'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 윤 정책관이 “처분을 무한정 유예한다면 법의 규율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적정한 기간을 설정할 예정”이라고 선을 그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예기간의 설정뿐만 아니라 취득 시점, 자금 출처, 영농 이력, 개발계획 연관성 등 투기를 판정할 엄격하고 투명한 기준이 담겨야 지역 간 형평성 시비를 차단할 수 있다. 나아가 임차농 보호를 부수적인 조치로 치부해서는 사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


윤관호 한국들녘경영체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은 “농지은행의 물리적 역량만으로는 현장의 방대한 임대차 수요를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다”며 “개인 간 임대차라 하더라도 투명하게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 창구를 열고 직불금과 세제 혜택이 서류상의 지주가 아닌 실제 경작자에게 실질적으로 귀속되도록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농지은행 위탁 과정에서 기존 임대차계약의 승계와 경작권 보장 기간을 법적으로 확실히 담보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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