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병원 쏠림, AI로 풀까…韓 의료 바꿀 '1.5차 의료' 구상

김효경 기자 (hyogg33@dailian.co.kr)

입력 2026.09.17 09:50  수정 2026.09.1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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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환자 분류하고 병원 간 진료정보까지 연결

분당서울대병원 연구팀, 한국형 미래 의료 청사진 제시

1.5차 의료체계 모델에서 강화되는 1차 의료체계의 기능. ⓒ분당서울대병원

환자가 몰리는 대형병원과 상대적으로 역할이 제한된 동네 병원 사이의 간극을 인공지능(AI)으로 메우는 새로운 의료체계가 제안됐다. AI가 환자의 상태를 미리 살피고 병원 간 진료 정보를 연결하는 한편, 병원을 찾지 않는 시간까지 건강 상태를 관리해 1차 의료의 역할을 넓히자는 구상이다.


정세영 분당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정보화실장) 연구팀은 이 같은 내용의 ‘1.5차 의료체계(1.5-Tier Healthcare System)’를 국제학술지 ‘npj Health Systems’에 최근 발표했다. 연구에는 박상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연구팀과 차지호 국회의원 등이 참여했다.


1.5차 의료체계의 핵심은 동네 병원으로 대표되는 1차 의료기관과 대형병원인 2·3차 의료기관 사이에 AI를 활용한 ‘중간 단계’를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의료기관이나 대규모 인력을 추가하는 대신 AI가 환자 분류부터 진료 연계, 질병 조기 발견, 지속적인 건강관리까지 지원해 기존 의료체계의 빈틈을 메우는 방식이다.


연구팀은 AI가 강화할 수 있는 1차 의료의 역할을 크게 ‘첫 관문’, ‘진료 조율’, ‘포괄적 진료’, ‘지속적 관리’ 등 네 가지로 제시했다.


우선 환자가 처음 의료기관을 찾았을 때 AI가 검사 결과나 영상 등을 분석해 대형병원 진료가 필요한 환자를 선별하는 방식이다. 실제 호주 1차 의료기관에서 자동 안저 촬영과 AI 녹내장 선별검사를 활용한 임상연구에서는 검사자 161명 가운데 18명(11.2%)이 자신도 알지 못했던 녹내장 환자로 새롭게 확인됐다.


병원과 병원 사이의 진료 정보도 AI가 연결할 수 있다. 환자가 동네 병원에서 대형병원으로 옮기거나 퇴원 후 다시 지역 의료기관에서 관리받는 과정에서 AI가 진료 의뢰서와 퇴원 요약서 작성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연구팀이 제시한 기존 연구에서는 전자의무기록(EMR) 데이터를 대형언어모델(LLM)에 입력한 결과, 별도의 사전 학습 없이도 진료 의뢰서와 퇴원 요약서를 최대 99.25%의 정확도로 작성했다.


기존 검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질환의 위험 신호를 찾아내는 역할도 가능하다. 미국 ‘노티파이-1(NOTIFY-1)’ 프로젝트에서는 다른 목적으로 촬영한 CT 영상을 AI로 다시 분석해 관상동맥 석회화를 찾아내고 이를 의료진과 환자에게 알렸다. 이후 스타틴(고지혈증 치료제) 처방률은 기존 6.9%에서 6개월 뒤 51.2%로 높아졌다.



분당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정세영 교수(정보화실장)ⓒ분당서울대병원

병원을 방문하지 않는 기간에는 AI가 환자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피는 역할을 맡는다. 당뇨병 환자가 집에서 측정한 혈당 등을 AI가 분석해 이상 신호를 의료진이나 환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연속혈당측정기와 AI 기반 맞춤형 생활습관 교정을 결합한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에서는 제2형 당뇨병 환자의 71.0%가 약물 없이 정상 혈당을 유지하거나 복용 약을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랍에미리트(UAE)의 AI 기반 원격 혈당관리 연구에서도 AI 관리군의 당화혈색소 개선 폭이 일반 치료군보다 크게 나타났다.


연구팀이 주목한 곳은 한국이다. 한국은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이 95%를 넘고 전 국민 건강보험이 갖춰져 있는 등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진료 횟수는 18회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6.5회)의 3배에 가까워, 진료 시간이 짧아지고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현상이 함께 나타난다. 연구팀은 이 같은 문제들이 공존하는 한국이야말로 1.5차 의료체계를 시험할 적합한 무대라고 설명했다.


다만 AI가 의료진을 대신해 진단이나 치료를 결정하는 구조는 아니다. 연구팀은 진료 서류 작성 등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업무에는 AI 활용 범위를 넓힐 수 있지만, 진단이나 약물 처방처럼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결정은 의료진이 최종적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5차 의료체계는 국내 도시 의료뿐 아니라 의료진이 부족한 농어촌이나 의료체계가 무너진 재난·분쟁 지역까지 염두에 뒀다. 의료 인력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간호사나 지역보건인력이 휴대형 AI 진단도구를 활용해 환자를 선별하고 필요한 경우 상급 의료기관으로 의뢰할 수 있다. 통신 인프라가 불안정한 재난·분쟁 지역에서는 인터넷 연결 없이 작동하는 AI를 활용해 최소한의 의료 기능을 유지하는 방식도 제시됐다.


정세영 교수는 “AI를 활용하면 특별히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의료가 가능해진다”며 “이번 연구는 ‘누구나 누리는 맞춤 의료’로 가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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