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문 두드리던 케이팝, 이제 세계가 찾을 ‘판’을 만든다 [이슈]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8.02 09:48  수정 2026.08.02 09:50

방탄소년단 그래미 불출품·‘패노메논’ 추진, 라틴권 시장까지…‘외부 인정’서 음악·플랫폼 주도권으로

그래미와 빌보드, 코첼라는 오랫동안 케이팝의 세계적 위상을 확인하는 주요 잣대였고, 해외 진출은 곧 미국 진출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방탄소년단(BTS)의 그래미 보이콧과 국내 글로벌 K컬처 행사 ‘패노메논’ 추진, 라틴아메리카로 넓어진 활동은 케이팝이 해외 무대에 초대받아 인정받는 단계에서 스스로 음악과 무대, 시장을 선택하는 단계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방탄소년단 ⓒ빅히트뮤직

방탄소년단은 지난달 29일 멤버들의 인스타그램에 같은 한국어 성명을 올리고 2027년 그래미 어워드에 음악을 출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데뷔 이후 처음 내린 결정이다. 이들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나뉘지 않고 음악 그 자체로 듣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미를 주관하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가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한 데 대한 문제 제기다. 아카데미는 새 부문 출품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앨범·노래·레코드 등 일반 부문에도 도전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은 아시아 음악을 지역과 언어로 별도 분류하는 기준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미국 음악계를 향해 이런 보이콧을 하는 모습은 사실상 처음 봤다. 방탄소년단이 제대로 목소리를 냈고, 용감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아시아에서 아무리 좋은 앨범이 나와도 본상보다 신설 부문으로 옮겨버릴 수 있다”며 “카테고리화 자체가 일종의 차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방탄소년단이 외부의 평가 기준에 질문을 던졌다면 ‘패노메논’은 국내에서 직접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려는 시도다.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2027년 12월 2일부터 12일까지 서울아레나와 고양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패노메논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케이팝 콘서트와 팬덤 시상식, 푸드·뷰티·패션·게임·웹툰 등의 전시와 체험을 결합한 행사다.


정부와 업계는 행사 기간 총 52만명, 이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 20만명을 유치해 약 1조원의 경제효과를 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이브·SM·JYP·YG도 합작법인을 중심으로 행사에 참여한다. 2028년부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해외 주요 도시에서 패노메논 페스티벌을 열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핵심은 ‘한국판 코첼라’라는 수식어보다 흐름의 변화에 있다. 지금까지 케이팝의 대표적인 성과가 한국 가수의 코첼라 출연이었다면, 패노메논은 국내 업계가 행사의 기획자이자 운영자가 돼 세계의 가수와 팬덤을 불러들이고 행사 브랜드까지 해외로 내보내겠다는 구상이다. 수출 대상이 가수와 음반에서 공연·시상식·팬덤 산업을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확장되는 셈이다.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회

미국 밖으로 넓어진 케이팝의 활동도 세계화 방식의 변화를 뒷받침한다. 국제음반산업협회의 ‘글로벌 음악 보고서 2026’에 따르면 2025년 라틴아메리카 음반 시장 매출은 전년보다 17.1% 늘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16년 연속 성장세로, 브라질은 14.1% 성장해 세계 8위, 멕시코는 13.3% 성장해 세계 10위 음악 시장에 올랐다.


이에 하이브는 중남미 출신 멤버들로 구성된 산토스 브라보스(SANTOS BRAVOS)를 출범시켜 케이팝 제작 시스템을 라틴 시장에 적용했다. 최근에는 라틴 장르 차용에서 현지 아티스트와의 협업, 공연 플랫폼 구축으로 확장되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에이티즈(ATEEZ)는 브라질리언 펑크 기반의 ‘배드’(BAD)와 라틴 트랩 장르의 ‘마마시타’(MAMACITA)를 선보였고, 르세라핌(LE SSERAFIM)은 라틴 하우스곡 ‘붐팔라’(BOOMPALA)를 발표했다. 에스파(aespa)는 타이틀곡 ‘레모네이드’(LEMONADE)의 베키 지(Becky G) 피처링 버전을, 보이넥스트도어(BOYNEXTDOOR)는 ‘바이럴’(VIRAL)의 산토스 브라보스 리믹스를 내놓으며 라틴권 아티스트와 접점을 넓혔다.


공연 시장 진출도 구체화되고 있다. 스트레이 키즈(Stray Kids)는 9월 콜롬비아 보고타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멕시코시티에서 현지 가수들과 함께하는 페스티벌형 공연 ‘스트레이시티’(STRAYCITY)를 개최하고 전 회차 헤드라이너로 나선다. 같은 달 브라질 ‘록 인 리우’에도 케이팝 가수 최초로 출연해 헤드라이너 무대를 맡는다. 라틴 사운드를 가져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지 아티스트와 음악을 만들고, 팬덤이 형성된 도시에 자체 공연 브랜드까지 세우는 단계로 옮겨간 흐름이다.


그래미와 미국 시장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음악시장이고 그래미가 지닌 상징성과 산업적 영향력도 크다. 변화의 핵심은 미국만을 세계화의 유일한 종착점으로 바라보던 전략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라틴 음악과 시장 역시 미국을 대신할 새로운 정답이 아니라 선택지가 늘어났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미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출발점일 뿐이다. 케이팝이 자신의 음악을 지키면서도 세계가 지속적으로 찾아올 무대와 권위 있는 평가 체계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세계화의 다음 단계도 증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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