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갉아 먹혀”…악역 배우들의 잔혹한 감정 소모 [이슈]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8.31 12:47  수정 2026.08.3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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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모·이휘향·박성웅·최민식, 강도 높은 악역 연기 후 소진·후유증 고백

역할과 자신 분리하는 '디롤링'…몰입만큼 중요한 회복 과정

할리우드, 제작 과정서 배우·스태프 정서적 안전 지원

배우 최병모가 악역 연기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을 털어놨다. 강도 높은 역할을 소화한 뒤 감정적인 소진을 겪거나 역할의 영향이 일상까지 이어졌다고 밝힌 배우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최병모는 최근 자신의 SNS를 통해 "악역이 이젠 체력적으로 버겁다"며 "오랜 시간 해온 악역이 몸과 마음을 갉아먹나 보다"라고 밝혔다. 자율신경실조증으로 1년 넘게 치료하고 있다는 그는 "없는 화를 자꾸 긁어내니 아무리 충전해도 몇 시간을 버티질 못한다"고 토로했다.


이휘향은 지난 22일 MBN '김주하의 데이앤나잇'에 출연해 반복되는 악역 연기로 배우 생활을 그만두려 했다고 고백했다. 이휘향은 "악역을 너무 몰아서 계속해 오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다. 없는 화를 계속 내 안에서 만들어내야 하니까 너무 힘들더라"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동료 배우들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 끝에 다시 배우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최민식·박성웅ⓒtvN '유퀴즈',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


강도 높은 역할의 영향이 촬영장을 넘어 일상으로 이어졌다는 배우들도 있다. 박성웅은 영화 '살인 의뢰', 드라마 '루갈' 등에서 악역을 연기한 뒤 공황장애를 겪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던 경험을 공개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던 중 갑자기 핸들을 꺾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칼을 보면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집에 있는 칼을 치워달라고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민식도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연쇄살인마를 연기한 뒤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느꼈다고 밝혔다. 최민식은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촬영을 할 때 실제로 엘레베이터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나에게 반말을 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때 '왜 나한테 반말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라며 스스로에게 놀랐던 상황을 전했다. 이어 "그 순간 나한테 섬뜩함을 느껴 다시는 살인마 연기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겪은 어려움의 정도와 양상은 다르지만 강도 높은 감정을 반복적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촬영 이후까지 영향을 받았다고 느꼈다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특히 악역은 분노와 적대감, 폭력성 등을 지속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폭력이나 죽음, 학대 등 정서적으로 부담이 큰 상황을 반복해서 촬영하는 경우도 있다.


연기 과정에서 만들어낸 감정과 배우 자신의 감정을 분리해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디롤링'(de-roling)이라고 한다. 역할을 상징하는 의상이나 분장을 벗거나 신체적인 긴장을 풀고, 배우 자신과 캐릭터를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방식이다.


국내에는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지원 제도가 마련돼 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활동 과정에서 심리적·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예술활동증명 완료 예술인을 대상으로 개인 심리상담과 심리검사를 지원한다. 1대1 상담은 최대 12회까지 받을 수 있으며 예술활동 및 직업 문제부터 우울·불안 등 정신건강 문제, 대인관계와 생애 위기사건 등을 다룬다. 문화예술 관련 단체 등이 참여할 수 있는 집단 심리상담도 운영한다.


배우가 작품을 준비하거나 촬영하는 과정에서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사례도 있다. 2012년 영화 '간기남'에는 정신과 전문의 김한규가 '심리수퍼바이저'로 참여해 시나리오 속 인물의 심리를 자문하고 배우들의 내면 연기를 도왔다. 주연 배우 박시연과 이광수도 배역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상담을 받았다.


성인 배우의 악역 연기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촬영 과정에서 배우의 심리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문가가 현장에 참여하는 사례는 아역배우를 중심으로도 확인된다. 상담심리사 황래영은 SBS '국민사형투표', '지옥에서 온 판사', '귀궁' 등에서 아동심리자문을 맡아 대본을 검토하고 촬영 현장에서 아역배우의 심리 상태를 살폈다.


이처럼 국내에서도 개별 작품의 필요에 따라 정신건강 전문가가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아역배우의 심리 보호나 특정 작품의 자문 등 필요에 따라 전문가를 개별적으로 섭외하는 방식이 중심이다.


해외에서는 정신건강 지원을 제작 과정의 전문 영역으로 두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2021년 정신건강 코디네이터 협회(Association of Mental Health Coordinators·AMHC)가 설립됐다. 영화와 드라마, 공연 등의 제작 과정에서 배우와 스태프의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정신건강 코디네이터'(Mental Health Coordinator·MHC)를 양성하고 있다.


MHC는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신적 위험을 파악하고 줄이는 역할을 한다. 대본에서 잠재적으로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확인하고 정서적으로 강도가 높은 장면을 촬영할 때 제작진과 배우를 지원한다. 트라우마나 약물 사용, 정신건강 문제를 작품에서 다룰 때 책임 있는 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도 업무에 포함된다. 현장 또는 원격으로 제작진과 출연자를 지원하고 제작사의 정신건강 관련 정책 수립에도 참여한다.


MHC의 탄생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와도 연결돼 있다. AMHC 공동 설립자들은 인티머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기존 업무의 범위를 넘어 정신건강과 관련한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별도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고 MHC의 영역을 발전시켰다.


개별 배우가 촬영 현장에서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사례도 있다. 레이디 가가는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를 연기하면서 캐릭터의 어두운 감정을 일상까지 가져오게 됐다고 밝혔다. 촬영 막바지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정신과 간호사가 현장에 함께하도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촬영장 밖의 지원 체계도 있다.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 SAG-AFTRA 회원은 엔터테인먼트 커뮤니티 펀드(Entertainment Community Fund)를 통해 정신건강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정신건강 평가와 위기 지원, 단기 상담을 비롯해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전문기관으로 연계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촬영 현장의 신체적·정서적 안전을 별도의 전문 영역으로 다루는 직군이 등장했다. 국내 1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권보람은 키스신이나 베드신 등 인티머시 장면에서 배우의 동의 범위와 경계를 확인하고 신체적·정서적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배우와 제작진 사이의 소통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병모를 비롯한 배우들의 경험을 보면 역할을 위해 끌어낸 감정이 촬영이 끝나는 순간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국내에서도 예술인 대상 심리상담부터 개별 작품의 심리자문, 아역배우를 위한 현장 심리자문 등 여러 형태의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다만 성인 배우의 고강도 감정 연기까지 포괄해 작품 준비부터 촬영,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과정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영역은 아직 개별 작품과 배우의 선택에 맡겨진 부분이 크다. 배우에게 역할에 대한 몰입을 요구하는 만큼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과정 역시 제작 과정에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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