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칸영화제 심사위원장…한국인 최초
나홍진 '호프', 4년 만에 한국 영화 경쟁부문 진출
제79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는 오랜만에 한국 영화 기세를 실감한 현장이었다. 박찬욱 감독이 한국인 최초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나홍진 감독의 '호프'(HOPE)가 4년 만에 한국 영화 경쟁부문 진출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정주리 감독의 '도라'는 감독주간에 각각 초청됐다. 경쟁·미드나잇·감독주간까지 한국 영화가 주요 섹션 곳곳에 자리하면서 지난해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형성했다.
ⓒ뉴시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제78회 칸영화제에서는 경쟁·비경쟁·주목할 만한 시선 등 공식 부문은 물론 감독주간·비평가주간까지, 26년 만에 한국 영화 초청작이 단 한 편도 없었다. 한국 영화가 칸 공식·비공식 부문 전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업계에서는 당시 상황을 두고 "한국 영화의 현재 체력이 드러난 결과"라는 반응이 나왔다.
칸영화제는 1984년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이후 꾸준히 한국 영화를 초청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감독상(2002), 박찬욱 감독 '올드보이' 심사위원대상(2004), 이창동 감독 '밀양'의 전도연 여우주연상(2007), 박찬욱 감독 '박쥐' 심사위원상(2009), 이창동 감독 '시' 각본상(2010), 봉준호 감독 '기생충' 황금종려상(2019),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감독상(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브로커'의 송강호 남우주연상(2022) 등 한국 영화는 오랜 시간 칸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증명했다.
그런 흐름이 한 차례 끊긴 뒤 맞이한 올해 칸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박찬욱 감독의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위촉이 시작이었다. 한국인 최초고, 아시아인으로는 1962년 일본의 후루카키 테츠로, 2006년 홍콩의 왕가위 이후 세 번째다. 박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2004년 처음 칸을 찾았을 때만 해도 가끔만 한국 영화가 소개되는 형편이었다. 한국은 더 이상 영화의 변방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영화진흥위원회 김영구 국제사업팀장은 "현지에서 만난 해외 영화인들이 지난해보다 확실히 한국 영화를 언급하고 관심을 갖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칸 필름마켓에 참가한 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등 국내 주요 투자배급사 해외 세일즈팀 역시 "해외 바이어 반응이 지난해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는 분위기를 공통적으로 전했다.
'호프' 티켓을 구하는 관객들·'호프' 전석매진 된 뤼미에르 극장·스크린데일리 5일차 표지 장식한 '호프'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올해 칸에서 가장 강한 화제를 만든 작품은 나홍진 감독의 '호프'였다. '헤어질 결심' 이후 4년 만에 경쟁부문에 진출한 한국 영화인 '호프'는 공개 전부터 올해 칸 최고 기대작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상영 이후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칸의 문법을 깨는 영화", "올해 가장 강렬한 극장 체험"이라는 호평과 함께 CG와 후반부 전개를 둘러싼 지적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 호불호 자체가 하나의 현상처럼 소비될 정도로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뤼미에르 대극장 상영 당시에는 표를 구하려는 관객들의 긴 줄이 이어졌고,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이 끝난 뒤에는 약 7분간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경쟁 부문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올해 칸 경쟁작 가운데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작품 중 하나였다는 말에는 이견이 없었다.
'호프'는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칸 필름마켓에서 200여 개국 선판매를 기록하며 역대 한국 영화 최고 수준의 해외 세일즈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추정 제작비만 500억원에서 많게는 700억원 이상으로 거론되는 작품인 만큼 시장 반응 역시 업계의 주요 관심사였다.
나홍진 감독 역시 이번 작품으로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데뷔작 '추격자'를 시작으로 '황해', '곡성', 그리고 '호프'까지 장편 연출작 전편이 칸에 초청되는 기록을 세웠다. 액션·스릴러·SF를 결합한 대중 장르영화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는 점에서 한국 장르영화의 외연을 넓혔다는 평가도 나왔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칸을 달궜다. '군체'는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로 봉쇄된 건물 안에서 생존자들이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감염자들과 맞서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부산행', '반도'를 잇는 이른바 '연니버스 좀비 3부작'의 완결점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전지현·구교환·지창욱·신현빈·김신록 등의 열연과 함께 진화형 좀비 설정이 호평을 받았다.
심야 상영임에도 뤼미에르 대극장은 관객들로 가득 찼고, 상영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함성과 박수를 이어갔다. '부산행'으로 K좀비 장르의 흐름을 만들었던 연상호 감독이 '군체'를 통해 다시 한번 장르를 확장시켰다는 반응도 현지에서 나왔다.
국내 흥행도 좋은 성적을 기록 중이다. 지난 21일 개봉한 '군체'는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최고 흥행작인 '왕과 사는 남자'와 비교해도 빠른 속도이자, 올해 개봉작 가운데서도 가장 가파른 흥행 추이다.
'도라' 첫 상영ⓒ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감독주간에 초청된 정주리 감독의 '도라'도 칸에서 첫 상영해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원인 불명의 피부병을 앓는 고3 학생 도라가 시골로 요양을 떠나 이웃 나미와 교류하며 겪는 내밀한 변화를 쫓는 작품으로, 감독주간 집행위원장 줄리앙 레지는 "20세기 초 프로이트의 도라 사례를 모티프로 한 자유롭고 독창적인 영화"라고 소개했다.
이로써 정주리 감독은 데뷔작 '도희야'(2014·주목할 만한 시선)와 '다음 소희'(2022·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이어 장편 세 편 모두를 칸에 진출시키며 한국 여성 감독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올해 칸은 경쟁부문부터 미드나잇 스크리닝, 감독주간까지 서로 다른 결의 한국 영화들이 고르게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남겼다.
올해 들어 국내 극장가에서도 한국 영화 흥행 흐름이 조금씩 살아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6년 1분기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체 관객 수는 3190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082만명) 대비 53.2% 증가했다. 극장 매출액 역시 지난해 1분기 2004억원에서 올해 3180억원으로 58.7% 늘었다. 1688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왕과 사는 남자'는 1518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1분기 전체 극장 매출의 47.7%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산업 전체의 회복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올해 1분기 흥행 1위인 '왕과 사는 남자'(1688만 명)와 2위 '살목지'(323만 명) 사이의 관객 수 격차는 1365만명에 달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팬데믹 이후 영화 제작 감소로 개봉작 수가 줄어들면서 특정 영화 한편의 흥행 성과에 따라 시장 규모가 좌우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들어 한국 영화 흥행 흐름이 살아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흥행작 중심의 성과가 시장 전체 회복으로 이어졌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불안 요소가 적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극장 관객 수는 1억609만명, 전체 매출액은 1조470억원 수준이었다. 팬데믹 직전인 2019년 전체 관객 수 2억2667만명과 비교하면 여전히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업계에서는 이런 흐름이 영화 제작 구조 자체를 바꿔놓았다고 본다. 관객 감소와 투자 위축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영화와 검증된 감독·IP 중심의 제작 경향이 강해졌고, 그 과정에서 한국 영화 생태계의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가 줄어들었다는 지적이다. OTT 오리지널 시리즈와 영화가 대규모 제작비를 앞세워 시장 경쟁에 뛰어든 점 역시 극장영화 투자 환경을 위축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안팎에서는 "새로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칸 초청 부진 당시에도 "박찬욱·봉준호·이창동 이후를 이을 감독군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주요 감독의 신작 출품 여부에 따라 한국 영화 전체 분위기가 좌우되는 현실 역시 산업의 현재 단면으로 거론된다.
그럼에도 올해 칸이 보여준 장면은 분명했다. 한국 영화는 여전히 세계 영화시장에서 강한 장르적 개성과 감독 브랜드를 지닌 콘텐츠로 유효하게 소비되고 있었다. 다만 지금 칸의 중심에 선 이름들은 대부분 수십 년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감독들이다. 중요한 건 올해의 반등을 일회성 분위기로 남기지 않고, 다음 세대의 영화와 감독들이 꾸준히 등장할 수 있는 산업 구조로 이어갈 수 있느냐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