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나미 역, 김도연과 호흡
"김도연, 지나칠 수 없는 생명력 있는 배우"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허문 것은 한 통의 편지, 그리고 대본 속 단 하나의 이미지였다. '어느 가족'(2018)과 '괴물'(2023)로 칸을 사로잡았던 일본의 배우 안도 사쿠라가 영화 '도라'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 영화에 출연하며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팔레 데 페스티벌 내 KOFIC 홍보관 인터뷰 자리에 섰다.
ⓒSusyLagrange-SD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공식 초청된 정주리 감독의 신작 '도라'는 알 수 없는 피부병을 앓는 도라(김도연 분)가 시골에서 나미(안도 사쿠라 분), 연수(송새벽 분) 부부와 지내며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로 인해 관계가 흔들리는 이야기다.
안도 사쿠라가 이 작품에 합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처음 작품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나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적인 압박이 컸어요. 또 예전에는 자극적이거나 수위가 높은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기도 했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그런 연기들에 대해 다시 한번 신중해지더라고요. 영화 자체가 지닌 자극과 드라마가 많다 보니, 지금 제가 가진 에너지와 과연 맞을까 고민이 깊었습니다. 제게는 좋은 대본이나 큰 역할보다, 제 안의 에너지와 타이밍이 잘 맞는지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매니저에게 못 하겠다고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정주리 감독님으로부터 진심 어린 편지를 받았습니다. 소통에 있어 저를 많이 배려해 주시고, 제게 맞춰주겠다는 말씀을 남겨주셨죠. 그 편지를 받고 나니 감독님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졌습니다.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극본 속 한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시나리오를 볼 때 '내가 이 그림 안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를 상상하곤 하는데요. 대본 속에서 나미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한 신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 장면이 진짜 저의 내면과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느꼈고, 결국 이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도라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과 예측할 수 없는 행동 사이, 나미라는 캐릭터가 가진 미묘한 모순은 영화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축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연기할 때 답을 정해 놓지 않습니다. 이 캐릭터가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미리 결론을 내려두고 연기하면, 영화가 가진 풍부한 매력과 요소를 오히려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독님께서 나미에 대해 자기 파괴적인 맥락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을 때, 나미의 행동에 공감되는 부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저도 완성된 영화를 관객의 입장에서 보았는데요. 나미라는 인물이 여러 상황과 사람들을 만나며 미묘하게 변화해 가더라고요. 다양한 표정들이 나오지만, 사실 연기할 때의 저는 그것을 의식하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순간,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나미는 도라나 상황 속에서 그저 자신만의 스탠스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변화를 억지로 보여주기보다, 살아 숨 쉬는 자연 속에서 제대로 스며드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자연 속에 스며들었기에, 그녀가 내리는 대처와 변화들이 관객분들에게도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안도 사쿠라의 시선에 비친 도라 역의 김도연은 단순한 화려함을 넘어선 단단한 원석이었다. 처음 가졌던 선입견을 깨고 작품의 핵심인 생명력과 순수한 사랑을 스크린 위에 훌륭하게 표현해 낸 후배 배우를 향해 안도 사쿠라는 감탄했다.
"처음 도라 역을 맡은 분의 이미지를 전달받았을 때는 머리도 굉장히 길고 스타일리시해서, 엄청나게 화려한 미인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배우가 도라를 한다고?' 하며 조금 놀라기도 했었죠. 하지만 영화를 보시면 알 수 있듯 완벽한 도라가 완성되었습니다. 김도연이라는 배우에게서 그런 모습을 파악하고 도라로 완성해 낸 감독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낀 도라 안에는 굉장히 거대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가 아주 솔직한 순간에도, 혹은 그렇지 못한 순간에도 항상 엄청난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어요. 이번 영화에서 우리가 더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김도연 씨의 연기 덕분입니다. 자칫 성적 충동이나 욕구로만 단순하게 읽힐 수 있었던 지점들이, 김도연 씨의 연기를 통해 아이와 같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추구,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치환되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스타일리시한 배우에게서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작은 원석 같은 생명력을 포착해 낸 작업은 제게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SusyLagrange-SD
안도 사쿠라에게 첫 한국 영화인 '도라'는 언어라는 커다란 숙제를 안겨준 작품이기도 했다. 외국어 연기가 줄 수 있는 특유의 위화감을 지우기 위해 감독과 끊임없이 소통했다는 그는, 이번 협업을 통해 대사를 넘어선 연기의 힘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부분에 대해 감독님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외국인 화자가 어설프게 언어를 잘하는 설정으로 나오면 위화감이 생겨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하는 편이라,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니 그 적절한 밸런스를 잡는 게 참 어려웠죠. 감사하게도 감독님께서 처음에 '한국어를 못해도 괜찮다. 일본어든 영어든 편한 것으로 하라'며 부담을 덜어주셨고, 덕분에 용기를 내어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일본어로 연기할 때도 '대사 자체가 정답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대사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내면이 존재하는데, 오히려 대사라는 언어에 묶여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번 작업을 통해 '연기는 결국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항상 추구해 왔던 연기 철학이 더 명확해진 느낌입니다. 오히려 언어적인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 배우인 도연 씨와 마주했을 때 그 순간 현장에서 태어나는 미묘한 공기와 감정에 훨씬 더 깊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로서 제약이 있으면 있을수록, 정작 그 신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의 본질이 발굴된다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도라'는 주연을 맡은 안도 사쿠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촬영감독의 참여, 한국과 유럽을 오간 후반 작업 등 4개국이 협력한 국제 공동제작 영화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베테랑들이 모여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달렸던 만큼, 현장에서 느낀 시너지는 배우에게도 새로운 예술적 자극이 됐다.
"촬영 현장의 시스템이나 문화가 다른 곳에서 작업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사실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오직 하나의 꿈을 모아서 이렇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제 안의 감동과 향상심을 엄청나게 고조시켜 주었습니다. 비단 어느 특정 국가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기보다는, 영화계가 좀 더 풍부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이번에 배운 귀한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영화에도 많이 참여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에서 '영화'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언어 때문에 힘들었다기보다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낯설음이 있었지만, 저희는 실제 영화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이기에 '하나의 좋은 작품을 만들자'는 명확한 취지 아래 금세 똘똘 뭉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를 지원해 주는 양국 프로덕션 차원에서는 행정적으로 조율하느라 굉장히 힘드셨을 테지만(웃음), 현장의 저희는 오직 영화 하나 만을 바라보며 정말 즐겁고 열정적으로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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