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찼다고 끝 아냐"…중견 조선사, 품질·납기로 호황 잇는다

이소영 기자 (sy@dailian.co.kr)

입력 2026.07.16 06:00  수정 2026.07.16 06:00

전 세계 수주 잔량 2억CGT 돌파…2028년 이후 인도 물량 57%

대한조선 공정 단축해 슬롯 확보…케이조선·HJ중공업 친환경선 확대

대한조선이 건조한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 ⓒ대한조선

조선업 호황으로 전 세계 주요 조선소들의 건조 일정이 2020년대 말까지 빠르게 차면서 국내 중견 조선사들의 수주 기회가 넓어지고 있다. 대형 조선사들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고부가 선박에 집중하는 사이 중견 조선사들은 주력 선종의 생산성과 품질 경쟁력을 높여 수주를 확대하고 있다.


16일 영국의 조선·해운 시황 분석 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 세계 신조선 수주량은 4295만CGT(1481척)로 지난해 같은 기간 2590만CGT(1101척)보다 66% 증가했다. CGT는 선박의 크기와 건조 난이도, 투입되는 작업량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지표다. 수치가 클수록 조선소가 확보한 건조 일감이 많다는 의미다.


올해 6월 말 기준 전 세계 조선소의 수주 잔량도 2억CGT를 넘어섰다. 국가별로는 중국이 1억3403만CGT로 전체의 65%를 차지했고, 한국은 3881만CGT로 19%를 기록했다.


수주 잔량이 늘면서 새로 발주하는 선박의 인도 시점도 뒤로 밀리고 있다. 올해 체결된 신조선 계약 가운데 57%는 2028년 이후 인도될 예정이며, 전체 계약의 20%는 인도까지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과 한국에 이어 일본 조선소도 2029년까지 인도 가능한 슬롯이 거의 남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며, 선주들 사이에서는 납기와 건조 능력을 더욱 면밀히 따지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현재 국내 조선 3사는 공급자 우위 시장을 활용해 LNG 운반선과 부유식 LNG 생산설비(FLNG), 초대형 가스운반선 등 고가 선종 중심으로 도크를 채우고 있다. 지난 5월 한국의 신조선 수주량은 199만CGT로 전 세계 발주량의 44%를 차지했다. 2023년 2월 이후 3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점유율이다.


이에 중견 조선사들도 탱커와 중형 컨테이너선 등 기존 강점을 앞세워 조선업 호황을 수주로 연결하고 있다. 대한조선은 올해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 15척을 수주해 2029년 말까지의 건조 물량을 확보했다. 올해 5월까지 누적 수주액은 1조9783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연간 생산 능력의 약 1.5년치에 해당한다.


수주 가격도 높아졌다. 대한조선이 수주한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의 척당 가격은 연초 8599만 달러에서 최근 9390만 달러로 9.2% 올랐다. 원화 기준으로는 1259억원에서 1414억원으로 12.3% 상승했다.


대한조선은 주력 선종의 반복 건조를 통해 공정 기간을 줄이고 단일 도크의 생산 효율을 높였다. 선박 한 척을 도크에서 건조하는 동시에 남는 공간에서 다음 선박의 일부를 함께 제작하는 텐덤 공법도 활용하고 있다.


이 같은 생산성 향상으로 기존 건조 일정 사이에 2028년 인도 슬롯을 추가로 확보했다. 대한조선은 지난 5월 해당 슬롯을 활용해 오세아니아 선사로부터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 2척을 총 2828억원에 수주했다. 이미 2029년까지 일감이 찬 상황에서도 공정을 단축해 추가 수주 여력을 만든 것이다.


케이조선은 주력인 중형 탱커의 상품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최근 파형 격벽을 적용한 7만4000톤급 석유제품운반선 설계에 대해 한국선급의 기본인증을 받았다. 화물창 내부 구조를 단순화해 세척과 유지보수 부담을 줄이고 석유제품과 화학제품을 모두 운송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HJ중공업도 컨테이너선에 친환경·디지털 기술을 더하고 있다. 최근 한국선급으로부터 바이오연료 추진 1만TEU급 컨테이너선 개념설계의 기본인증을 받았다. HD현대의 자율운항 전문기업 아비커스와는 상선에 자율운항 솔루션을 적용하는 협력을 추진 중이다.


글로벌 조선소의 슬롯 부족이 중형선 시장에 새로운 기회를 연 것은 사실이지만 중견 조선사들은 이를 단순한 ‘낙수효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기존 고객의 반복 발주와 납기 준수, 주력 선종의 품질 및 생산성 경쟁력이 조선 호황과 맞물린 결과라는 설명이다.


국내 중견 조선사 관계자는 “중견 시장의 발주 기회가 넓어진 측면은 있다”면서도 “실제 수주는 납기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품질과 원가 경쟁력, 반복 건조 실적을 함께 인정 받아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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