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노모어 서울' 개막 1년, 오픈런 전체 1위 유지
대학로 오픈런 공연 건수는 3년새 16.5% 급감
"요즘 관객들, 애매한 저가 공연보다 확실한 가치에 소비"
어두운 조명과 정적 속에서 하얀 가면을 착용한 관객들이 대사 없는 배우들의 강렬한 신체 표현을 따라 6개 층의 거대한 호텔 내부를 이동한다. 고정된 객석이 없는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배우의 동선을 전력으로 추적하기도 하고, 호텔 곳곳에 마련된 방을 뒤적이며 숨겨진 단서를 직접 찾아내기도 한다.
서울 중구 매키탄 호텔에서 공연 중인 '슬립노모어' ⓒ미쓰잭슨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매키탄 호텔(구 대한극장)에서 문을 연 지 1년이 된 관객 참여형(이머시브) 연극 ‘슬립노모어’는 관객이 주도적으로 공간과 배우를 선택하여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하는 구조를 취한다. 관객을 극의 능동적인 주체로 끌어들인 이 포맷은 1년이 지난 현재까지 꾸준히 관객을 모으면서, 올해 상반기 국내 오픈런 공연 전체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슬립노모어 서울’의 흥행은 기존 공연계의 통념을 완전히 깨부순 고가 정책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이 작품의 티켓 가격은 입장 회차에 따라 일반석 기준 16만원에서 20만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특별 혜택이 포함된 프리미엄 패키지는 24만원에서 최고 36만원(1인 기준)에 달한다.
일부 회차에 제공되는 대학생 30% 할인(최저 11만 2000원)을 제외하면 웬만한 대형 뮤지컬 VIP석 가격을 상회하는 초고가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개막 첫 달 예매율은 무려 98%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다. 더구나 최근엔 해외 플랫폼에 티켓을 오픈하면서 외국인 관객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오는 8월 ‘슬립노모어 상하이’ 공연이 폐막함에 따라 외국인 관객은 더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배우들의 정교한 신체 표현과 감각적인 공간 연출만으로 진행되는 극적 특성은 관객마다 매번 전혀 다른 서사를 마주하게 만든다. 이러한 대체 불가능한 특성이 강력한 N차 관람(재관람) 마니아층을 형성했고, 이는 고가 장벽을 극복하고 장기 흥행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반면 한국 연극의 메카이자 전통적인 오픈런 공연의 중심지였던 대학로 소극장 가의 풍경은 여전히 냉랭하다. 수년간 자리를 지키던 상징적인 장기 흥행작들이 줄줄이 간판을 내리고 있으며, 상시 관객을 맞이하던 소극장들은 극심한 관객 감소와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현장은 일시적인 경기 침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오픈런 시장 구조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이 집계한 최근 3년간의 오픈런 시장 추이를 살펴보면, 국내 오픈런 공연 건수는 2023년 231건에서 2025년 193건으로 2년 만에 16.5%가 감소했다. 시장 전체의 규모를 나타내는 총 티켓 판매액 역시 동기간 약 326억원에서 287억원으로 12.1% 축소됐다. 더욱 심각한 지표는 개별 공연의 내실을 나타내는 공연 1회당 평균 판매액이다. 기존 회당 77.8만원 선을 유지하던 평균 판매액은 2025년 기준 62.6만원으로 무려 19.6% 급감했다.
제작비와 대관료, 배우 및 스태프 인건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한 반면 회당 수익성이 무너지면서, 전통적인 저가형 소극장 오픈런 모델이 명백한 한계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린 두 무대의 명암은 국내 공연 소비층이 ‘가성비’에서 ‘하이엔드 체험’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과거 대학로 소극장 오픈런 연극은 1~3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가볍게 즐기는 일상적 데이트 코스나 여가 활동으로 소비됐으나, 고물가 기조가 고착화되고 대중의 문화적 눈높이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관객들의 지출 방식이 달라진 셈이다. 애매한 만족감을 주는 저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기보다, 단 한 번을 보더라도 오직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독보적이고 강렬한 경험에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성향이 뚜렷해진 결과다.
한 대학로 소극장 관계자는 “기존의 저가 티켓 출혈 경쟁이나 기약 없는 오픈런 방식으로는 치솟는 제작비와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며 “이제는 소극장의 강점인 ‘관객과의 밀착 소통’을 활용해 관객의 선택에 따라 전개가 달라지는 인터랙티브 극이나 참여형 포맷 등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꾸준히 인기를 끄는 ‘쉬어매드니스’나 ‘트레이스 유’ 지난해 인기리에 공연한 연극 ‘미러’ 등의 공연들만 봐도 요즘 공연 소비층이 어떤 작품을 원하고, 오래 살아남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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