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거들 뿐…유흥가 지고, ‘취향’ 켜는 상권 [취하지 않는 사회③]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7.09 14:28  수정 2026.07.09 14:28

'폐업률 4.9%' 문 닫는 대형 호프집…'북바·테이스팅 전문 룸'이 대체

"소맥 대신 뮤지컬 관람" 사내 만족도92%까지 치솟아

대중의 소버 라이프 인식 변화와 미디어 콘텐츠의 진화는 마침내 우리 삶이 영위되는 실제 물리적 공간인 오프라인 상권과 기업의 업무 문화 지형도까지 통째로 재편하고 있다. 밤늦은 시간까지 붉은 네온사인 아래에서 폭음과 2차, 3차 강제 이동이 대물림되던 전통적인 유흥가 상권은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다. 반면 개인의 취향을 밀도 있게 충족시키고 통제된 범위 내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대안적 문화 공간들이 새로운 주류 소비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식업/호프-간이주점 개·폐업 추이 데이터ⓒ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

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외식업/호프-간이주점’ 개·폐업 추이 데이터에 따르면, 폭음 문화의 쇠퇴와 믹솔로지 트렌드가 맞물린 최근 2~3년간 서울 전역의 전통적 호프집들은 격심한 구조조정을 겪고 있다. 특히 대형 주점들의 위기가 본격화된 2024년 2분기의 경우, 서울 전체에서 호프·간이주점의 폐업률은 4.9%까지 치솟으며 불과 3개월 만에 780곳이 무더기로 문을 닫았다. 반면 같은 분기 개업률은 2.7%(432곳)에 불과해, 폐업 점포 수가 개업의 1.8배에 달했다. 이 시기 3분기와 4분기 역시 각각 713곳, 672곳이 연속 폐업하며 폐업률 4%대 후반의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이러한 ‘개업 가뭄과 폐업 홍수’ 현상은 최근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장 최신 지표인 2026년 1분기 기준 서울 시내에서 새로 문을 연 호프·간이주점은 272곳(개업률 2.0%)에 그쳤다. 반면 문을 닫은 곳은 547곳(폐업률 3.9%)으로 집계되어, 여전히 문을 닫는 가게가 새로 여는 가게보다 2배 이상 많았다. 단 한 분기도 빠짐없이 폐업 수가 개업 수를 압도하는 역성장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넓은 평수에 대형 테이블을 배치하고 소주와 맥주를 대량으로 소비하던 전통적 형태의 호프집들이 상권에서 빠르게 퇴출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서와 위스키를 함께 결합해 조용히 즐기는 ‘북바’(Book Bar), 혼자 방문해도 타인의 시선 없이 싱글몰트 위스키나 전통 잔술을 음미할 수 있는 소규모 매장, 개인의 미식 취향에 맞춰 크래프트 맥주와 내추럴 와인을 시음하고 설명 듣는 테이스팅 전문 룸들은 예약제로 운영될 만큼 성황을 이룬다. 술을 많이 마셔 만취하는 유흥 공간이 아니라, 공간이 가진 고유한 정취와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취향 공간으로 관심이 완전히 옮겨간 결과다.


7년째 전통주점을 운영 중인 강호철(가명·41) 씨는 “예전에는 이미 취한 단체 손님이 몰려와 다량의 술을 시켜 마시는 게 매출의 핵심이었지만, 최근에는 퇴근길에 혼자 오거나 소수의 손님이 방문한다”며 “특히 달라진 부분은 그냥 취하기 위해 술을 마셨던 과거와 달리, 막걸리를 비롯한 전통주의 종류나, 제조법 등을 물어보며 한두 잔만 깊이 있게 음미하고 가는 손님이 많아졌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성수동과 한남동 등 트렌디한 골목을 주도하는 주류 브랜드들의 팝업스토어 공간 역시 방문객에게 제품의 과도한 음용이나 대량 구매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브랜드의 역사와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미디어 아트 전시 공간을 배치하고, 브랜드 굿즈를 판매하며, 자신만의 칵테일을 직접 배합해 보는 믹솔로지(Mixology) 클래스를 운영하는 등 ‘문화 경험 설계’에 전력을 다한다. 젊은 소비자층에게 술은 더 이상 취하기 위한 유흥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자 놀이 문화 콘텐츠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

이와 동시에 기업 내부의 고질적 폐해로 지적되던 ‘회식 잔혹사’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주52시간 근무제의 정착, 가파른 외식 물가 상승, 그리고 직장 내 핵심 실무진으로 자리 잡은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 변화가 맞물린 결과다.


그 자리를 대신해 점심시간을 활용해 유명 미식 매장을 탐방하는 맛집 회식, 스크린 스포츠나 방탈출 게임, 볼링 등을 함께 즐기는 액티비티 회식, 퇴근 후 다 함께 연극·뮤지컬 등 문화 공연을 관람한 뒤 가벼운 와인 한 모금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문화 회식’ 트렌드가 완벽한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의 인사팀 관계자는 “과거에는 술을 잘 마시고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조직 융화력이나 역량으로 평가받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방식이 오히려 조직의 건강성을 해치는 리스크로 인식된다”며 “저녁 소맥 회식을 없애고 분기별 뮤지컬 관람이나 원데이 클래스로 회식 예산을 전환한 이후 사내 만족도 조사에서 긍정 답변이 92%까지 치솟았다”고 밝혔다.


이어 “과거의 회식이 집단주의를 강화하는 의무적 ‘업무의 연장’이었다면, 이제는 직원 개개인의 일상을 존중하고 충전을 제공하는 ‘사내 복지’의 개념으로 바뀌었다”라며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하느냐가 향후 기업의 인재 유치와 경쟁력을 결정짓는 지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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