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금융 안돼”…채무조정 늘리는 은행권, 커지는 딜레마

손지연 기자 (nidana@dailian.co.kr)

입력 2026.05.27 07:03  수정 2026.05.27 07:03

5대 시중은행 자체 채무조정 4배 급증

‘빚 탕감’ 아닌 장기분할상환 중심 정상화 유도

“취약차주 지원 필요하지만 악용 가능성도”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3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임기근 기획예산처 차관(왼쪽), 이억원 금융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김 실장은 최근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금융권의 ‘잔인한 금융’ 관행 개선과 포용금융 확대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위원장 역시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금융권의 포용금융 역할 강화를 주문했다.ⓒ뉴시스

이재명 정부가 금융권의 ‘잔인한 금융’ 관행 개선과 포용금융 확대를 주문하면서 시중은행들의 자체 채무조정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확대되는 자체 채무조정이 장기연체채권 소각이나 ‘빚 탕감’이 아니라 정상 상환을 유도하기 위한 장기 분할상환 성격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다만 금융당국의 압박 속에 채무조정 확대 경쟁이 과도해질 경우 도덕적 해이와 은행 건전성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자체 채무조정 실행 건수는 올해 1~4월 4611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1183건)보다 4배 가까이 증가한 수준이다. 금액 기준으로도 같은 기간 105억원에서 359억원으로 늘었다.


은행권 자체 채무조정은 신용회복위원회 워크아웃이나 법원의 개인회생·파산과 달리 금융회사가 차주의 상환 능력을 고려해 자체적으로 상환 조건을 조정해주는 제도다.


2024년 10월 개인채무자보호법 시행 이후 대출 원금 3000만원 미만 연체자는 금융회사에 직접 채무조정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금융회사는 차주의 상환 능력과 회수 가능성 등을 고려해 금리 인하, 장기 분할상환, 상환 유예 등의 조정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은행권에서는 최근 급증한 자체 채무조정을 ‘빚 탕감’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설명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체 채무조정은 빚을 없애주는 개념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상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에 가깝다”며 “대표적인 방식도 장기 분할상환 유도”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논란이 되는 채권 소각과는 완전히 다른 단계의 개념”이라고 선을 그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월 ‘개인 연체채권 관리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금융회사별 채무조정 실적 공시와 포용금융 평가 반영 방침을 내놨다.


금융감독원도 최근 5대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개인채무자보호법 준수 여부를 점검하기 위한 수시검사에 착수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금융권의 장기 연체채권 추심 관행을 두고 이른바 ‘잔인한 금융’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금융권의 선제적 채무조정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연체는 영업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의 성격도 있다”며 “장기 연체자들이 다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 경제의 잠재력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언급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실제 금융당국의 채무조정 활성화 기조 이후 은행 자체 채무조정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은행 자체 채무조정이 지금처럼 활성화돼 있지 않았다”며 “금융당국이 활성화 기조를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신용회복위원회 관계자는 “실제 현장에서는 채무가 더 커지기 전에 조정을 통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는 사례가 많다”며 “사전에 채무를 조정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포용금융 확대 기조가 장기적으로 은행 건전성과 여신 원칙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금융권에서는 금융의 역할은 차주의 상환 능력과 리스크를 정교하게 평가해 자금을 배분하는 데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치·정책 논리 중심으로 채무조정 확대 압박이 이어질 경우 중·저신용자 대출 자체가 더 위축되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견해다.


연체 차주의 정상화를 돕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금융당국의 정책 드라이브가 강해질수록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보다 정책 기조를 우선 고려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상적으로 상환이 어려운 차주를 지원할 필요성은 분명하지만, 일부 차주가 제도를 악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며 “결국 연체 리스크가 커질수록 신규 대출 심사는 더 보수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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